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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주 May 12. 2019

내가 오늘도 펜을 붙잡고 어둠 속을 헤매는 이유

당신의 문장에는 나름의 지향점이 있나요?



어느 왕국에 아름다운 여인이 살았다. 

사내들은 그녀의 마음을 얻으려 애썼다. 


노모와 함께 사는 한 남자도 그중 하나였다. 

그는 마을 어귀에서 작은 푸줏간을 했다.


여인을 향한 연정은 그의 마음속에서 

뜨거운 불덩이가 되어 종일 굴러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여인과 마주친 사내는 

감춰온 마음을 내보였다. 


“내 마음을, 내가 지닌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남자가 내게 사랑을 고백했어요. 다들 진귀한 보물과 희귀한 동물을 가져왔지만  내 마음은 요동하지 않았습니다. 흠, 정말 특별한 것을 보면 내가 흔들릴지도 모르겠네요.”


“특별한 것이라면….”


“혹시 당신이 가장 아끼는 사람의 심장을 가져올 수 있나요?”


“제가 가장 아끼는 사람은 제 어머니인걸요….”


“당신이 가장 소중한 것을 버릴 수 있다면 나는 다른 남자들의 구애를 물리치고 당신의 청혼을 수락할게요.” 


사랑에 눈이 먼 사내는 그날 밤 짐승으로 돌변했다. 어머니가 잠든 사이 심장을 파냈다. 동이 트자마자 어머니의 심장을 들고 여인을 만나러 뛰어가던 그는 그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그때였다. 아직 온기가 식지 않은 심장에서 울음기 섞인 어머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들아, 어디 다쳤느냐? 천천히 가거라, 천천히….” 



집 근처 어느 카페에서. 전 집필실이 따로 없습니다. 점심을 먹고 집 근처 서점과 카페를 배회하면서 원고를 씁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문장과 글감을 수집하는 것이죠.


몇 해 전 어느 잡지에서 이 우화를 읽자마자 나는 막심 고리키의 소설 《어머니》에 나오는 문장을 떠올렸다. “이 세상 모든 어머니의 눈물은 마르지 않는다.”


잡지를 덮고는 가슴에 손을 얹고  눈을 감았다. 내 안에서 물음이 돋아났다. 그동안 나는 부모의 심장을 도려낸 적이 없었나? 자신 있게 아니라고 답할 수 없었다.


바다 해(海)에는 어미 모(母)가 스며 있다. 어머니는 바다를 닮았다. 자식이 감히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어머니의 마음은 깊고도 따듯하다. 그 품에 안기면 어른도 아이가 된다. 


어머니의 사랑은 맹목적이다. 자신의 삶이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매번 자식을 보듬는다. 심장을 도려내는 아픔을 겪고 억장이 무너지더라도 어머니는 끝내 자식을 용서한다. 제아무리 짙은 어둠 속에서도 어머니의 사랑은 어둠을 찢고 빛을 향해 나아간다.  


나는 내가 쓰는 글이 

어머니의 사랑을 닮았으면 좋겠다. 

내 손끝에서 돋아나는 문장이 어둠을 가로질러 

빛을 향해 날아가는 새가 되었으면 한다. 

그 새들이 누군가의 삶을 

밝은 쪽으로 안내하기를 바란다.



이는 내 글쓰기의 지향점이다. 내 문장과 마음이 향하는 방향이다. 지향점은 본디 과거가 아니라 미래의 문제다. 지향점이 어딘가에 따라 걸음을 옮기는 방법과 속도와 리듬이 달라진다. 무엇보다, 지향점이 명확하면 나아갈 힘이 생긴다. 


한때 취재 기자로 일했던 나는 절망의 경계에 주저앉은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때로는 어둠의 밑바닥이라고 부를 만한 곳까지 내려갔고, 더러는 현실의 비루함과 잔혹함을 온몸으로 매만지면서 허공으로 흩어지는 어둠의 파편들을 들여다보았다.

 

어둠의 성질을 헤아림으로써 나는 빛의 성질도 알 수 있었다. 그러자 마음속에서 ‘어둠을 손가락질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빛나는 걸 찾아내는 것이야말로 가치 있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싹트기 시작했다.


문득 돌이켜본다.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삶을 탓하며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버둥거리던 어느 날, 어머니는 내게 한 줄기 빛을 던져주었다. 절망의 구름을 뚫고 내리 꽂히던 빛의 입자를 따라가 보니, 그곳에서 커다란 빛의 줄기를 어루만질 수 있었다. 내 안의 어둠이 조금씩 걷히기 시작했다.


내가 살아가는 세계는 여전히 빛보다 어둠이 더 많이 서려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날의 기억을 가슴에 품은 채 오늘도 펜을 붙들고 어둠 속을 헤맨다. 


언젠가 내 문장이, 빛이 쏟아지는 곳에 닿으리라 믿으며….


 <글의 품격> 중에서




많은 작가가 그러할 테지만, 저 역시 퇴고와 교정을 할 때 꼭 낭독을 하는 편입니다. 뭐랄까요. 낭독은 활자를 흔들어 깨운다고 할까요...


이기주 작가입니다. 지은 책으론 <언어의 온도>와 <말의 품격> <한때 소중했던 것들> 등이 있습니다. 신간  《글의 품격》을 준비 중입니다. 한 권의 책 안으로 들어가는 문은 하나지만 밖으로 나오는 문은 여럿이 아닐까 생각해요. 책 안에 다양한 샛길이 존재하기 때문이죠. 《글의 품격》을 가로지르는 무수한 ‘활자의 길’을 각자의 리듬으로 자유롭게 거닐었으면 합니다. 길 위에서 무엇을 보고 듣고 느낄지는 오로지 읽는 사람의 몫이죠. 다만 제 책을 덮은 뒤 당신의 손끝에서 돋아난 문장이 소중한 이들의 가슴에 가닿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이 일으킨 문장의 물결이, 당신의 진심을 실어 나르기를 바랍니다. 이기주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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