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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내 INAE Sep 23. 2024

1일차. 체크인하기 - (1)

공기의 냄새를 맡아본다. 입추가 지난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떠나질 않는 여름의 미련을. 구름이 잔뜩 머금고 내뱉질 않는 빗물의 습기와 뜨거운 햇볕으로 달궈진 아스팔트의 아지랑이. 땅 위의 모든 것을 끓여 피워낸 영혼의 수증기를 맡다보면 숨을 쉬는 순간마다 몸이 무거워져. 마치 숨 하나에 죄 하나를 짓는 듯이.


숨을 쉬는 즉시 더 큰 숨을 내뱉는다. 몸 안에 남은 숨이 없어질 때까지 내뱉고만 싶다.


"손님! 안 더워요?"


열린 창문틀에 머리를 기대고 가만히 눈을 감아 상념에 빠져있다가 대뜸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떴다. 버스기사님께서 백미러로 나를 똑바로 쳐다보시며 소리친다.


"네?"

"더우면 에어컨 틀어드리려고! 덥지 않아요?"

"예,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반말도 존대도 아닌 묘한 말투의 기사님이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시며 버스 하차문을 닫는다. 둘러보니 승합차만 한 버스에 오로지 나뿐이다. 하루에 다섯 대뿐인 시골 버스인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손님이 나뿐이라니. 얼마나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버스길래 손님이 이렇게 없을까 싶다.


텅텅텅-


컨테이너로 작게 지어진 버스터미널을 이제 막 떠나려 속력을 내는 버스의 옆구리를 누군가 거세게 두드렸다. 버스가 급히 멈춰 몸이 조금 덜컹거렸다. 뻬엥- 소리를 내며 버스문이 다시 열린다. 한 할머니께서 힘겹게 계단을 오르시고, 기사님은 얼굴을 잔뜩 구겼다.


"이 할머니가 또 시작이야! 미리미리 와서 기다리시라니까!"

"응, 응~ 미안해~"

"또 말만 미안하다지.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으면서. 그러다 다치면 누구 인생을 말아먹으려고..."


할머니의 상습적인 돌발행동에 쌓인 게 많았는지 기사님이 계속 불만을 토로함에도 할머니는 사근히 웃으면서 계단을 다 올라와 숨을 한 번 툭 뱉으셨다. 그리곤 덜렁- 내 옆에 앉으신다.


버스에 자리도 많고 손님이라곤 나와 할머니 둘뿐인데, 아무리 내 자리가 하차문과 제일 가까운 자리라고는 해도 꼭 여기 앉으셔야 하나. 소리 없이 혀를 쯧- 찼다가 한숨을 쉬며 나쁜 생각을 뱉었다. 앉은자리가 2인용 좌석이기도 하고 내가 전세 낸 버스도 아니면서 쓸데없이 불편해하지 말자고. 도로 창문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겨우 네 개뿐인 버스 계단을 오르느라 힘에 부쳤는지 할머니의 옅은 숨소리가 새액새액 들려온다. 백미러로 이쪽을 쳐다보며 은근히 미소 짓는 기사님.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에 머릿결이 날린다. 읍내를 떠나온 버스가 이젠 마주 오는 차를 위해 피해 줘야 할 정도로 좁고 오래된 시골길로 들어섰다.


한층 거른 햇볕이 이불처럼 덮인다. 무수한 나뭇잎이 바람결에 서로 몸을 부딪히며 지저귀고, 바람을 탄 나뭇잎 냄새가 달큼하게 맡아진다.


고요하고 포근한 시골의 향기와 바람. 기분이 좋아서 절로 다시 눈이 감긴다.


"어디까지 가요?"


이번엔 할머니께서 내게 말을 건다. 고개를 내게 바짝 대고선 당신의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이유로 소리를 지르듯이 말을 걸어오셨다. 단잠을 자꾸 방해받는 것 같은 기분에 살짝 짜증이 났지만 티 내지 않으며 웃어 보였다.


"저는 종점까지 가요."

"이 버스 종점이면 산 밑에 상천벌? 내리자마자 마을회관 있고 그 앞에 바로 개울 있는 거기?"

"하하, 글쎄요. 저도 오늘 처음 가는 곳이라 잘..."

"어쩐지 처음 보는 얼굴이더라. 내가 평생 여기 살아서 이 동네 사람들 얼굴을 다 알지."


이미 할머니는 내 말은 아무 상관없이 당신의 생각에 빠져 말씀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누군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이미 중요하지 않다. 이젠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끊길 거란 걸 안다.


나야말로 상관없다. 난 노인분들 이야기를 들어드리는 걸 좋아하니까. 정확히는 당신만의 세계에 빠져 이야기를 나누는 노인의 얼굴을 구경하는 걸 좋아한다. 얼굴에 깊게 내려앉은 세월의 주름과 야무지게 다물린 입술과 과거를 회상하며 빛을 내는 눈빛이 좋다.


나는 가지지 못할 세월의 매력을. 꿈도 못 꿀 세월의 깊이를 존경한다.


"부모님 보러 왔어?"

"아, 아뇨. 펜션에 놀러 왔어요."

"혼자서? 요즘 아가씨들은 겁이 없어."


그 말엔 달리 할 말이 없어서 그저 웃고 말았다.


"가만."


할머니가 잠시 무언갈 생각하신다. 묘하게 인상이 구겨지기 시작한다.


"상천벌에 펜션은 거기 하나뿐인데... 설마 거길 가려고?"

"거기요?"

"아가씨 가는 펜션 이름이 뭐라고?"

"요정펜션...이에요. 왜 그러세요?"


펜션 이름을 말씀드리니 이젠 안색이 어두워지기까지 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나로서는 할머니께 왜 그러냐 묻는 수밖에 없었지만 대답은 한참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절로 기사님을 바라봤다. 할머니와 내 얘기를 흘려들으시던 기사님도 적잖이 당황하신 듯 백미러로 나와 눈을 마주쳤다.


탁- 할머니의 두툼하고 차가운 두 손이 내 왼손을 낚아채듯 포개 잡았다.


"가지 마."

"네?"

"젊은 청년이 뭐가 아쉬워서 그런 데를 가. 가지 마."

"왜요? 거기가 그렇게 이상한 곳이에요?"


어쩐지. 예약할 때부터 기분이 께름칙하긴 했다. '요정펜션'이라니. 아주 옛날에 어릴 적 부모님에게 이끌려 갔었던 바닷가 근처의 허름한 민박 이름 같달까. 좋게 말하면 그 시절의 향수가 느껴진다고 하겠고, 솔직한 말로는 촌스럽다. 그래서 요즘 유행하는 예쁜 인테리어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아마 컨테이너에 침대도 없이 이불과 요만 있는 정말 잠만 잘 수 있는 곳이라고도 생각했다.


할머니 반응을 보아하니 설마 진짜로 예쁜 구석 하나도 없는 펜션인가 보다. 젠장. 이럴 거면 값싼 텐트 하나 사서 아무 데서나 노숙을 하는 게 낭만이라도 있겠다.


"거기..."


그러게 펜션을 예약하면서 어떻게 생긴 펜션인지 확인하지도 않고 덜컥 예약을 왜 했느냐고. 이를 어쩐다.


"거기 귀신 들렸어."


당일 취소는 환불 안 해줄 텐데... 네?


"네?"

"거기 가면 죽는다고."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몸도 머리도 얼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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