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은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한다는 당연한 말을 장황하게 하는 이유
러닝 대회에 나가겠노라며 호기롭게 참가 버튼을 누른 지도 2주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사이 작업이 들어와 눈 뜨면 거실 소파로 향했던 내 몸은 주방 식탁으로 목적지를 변경했다. 자연스레 누워 있는 시간보다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시선은 노트북 모니터에 고정하고 손가락으로 뜨거운 자판을 스타카토로 정신없이 두들기며 마감 시간을 향해 달리고 있었고 내 마음도 이미 어딘가를 달리고 있었다.
그래, 마음만큼은 그랬다.
머리로는 벌써 단기 마라톤을 몇 번 완주했고, 도심 하프 마라톤 코스를 준비하면서 세계 벌써 마라톤 대회 참가하리라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제대로 뛰어 본 적도 없으면서 검색하여 영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다리에 근육통이 오는 것 같았고 입에서 피 맛이 나는 것 같았다. 동시에 결승선을 통과하는 짜릿함도 느껴졌다. 고통과 쾌감의 동기 부여 영상을 보면서 ‘나도 저들처럼’ 하는 마음으로 할 수 있으리라 ‘굳건히’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할 수 있어!’
‘할 수 있을까…?’
느낌표에서 물음표로 바뀌는 이런 다짐, 참으로 무의미하고 공허하다.
사전 조사와 경험 없이 어깨너머 조악하게 짜깁기 한 이야기 같고, 한 번의 긴 숨으로 훅 밀어 버리면 사라질 연기 같다. 뭔가를 하겠다고 결심한 순간이 얼마나 많았는지, 이번에도 흐지부지되는 게 거의 확실해 보였다. 나 자신을 믿지 못했고 믿지 않았다. 의심과 확신 사이에서 나 자신을 속이는 방법을 무의식적으로 택했는지도 모르겠다. 대회 참가 취소 신청까지도 대놓고 유예하다가 더는 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그때 어쩔 수 없이 뛰게 만들려는 수법. 이건 나 자신을 믿지 못하는 게 아니라 너무 믿는 거 아닌가?
‘걸을 수 있으면 뛸 수 있겠지’
이 생각에 도달하자, 갑자기 작가교육원에서 들었던 첫 수업이 떠올랐다.
‘글 쓴다고 드라마 쓸 수 있을까요?’
그렇다. 말이라고 다 같은 말이 아니다. 우리말 한다고 외국말 하는 거 아니다. 유연하게 요가 좀 한다고 잘 달리라는 보장은 없다.
도대체 마지막으로 달리기를 한 게 언제였지?
고등학생 때 운동장 대여섯 바퀴를 뛴 게 마지막인 거 같은데…. 사회생활을 한 이후로 뛰기는 지각과 같은 의미였다. 출근 시간, 미팅 시간, 비행기 시간처럼 뒤처진 시간을 확보하기 위한 몸부림 정도였다. 그리고 지각 무마용 뛰기의 거리는 1km 도 안 되었을 것이다.
나의 무모한 달리기 도전은 마치 이제 막 외국어에 입문한 사람이 소설 번역작업을 덥석 받아버린 것과 같았다. 검색한 수많은 러닝 영상의 멋진 모습에는 러너들이 처음 시작했을 때의 불안과 용기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무대에 올라 스포트라이트에 비친 잔근육이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경쾌하게 멋진 모습뿐이다. 그들의 반복된 관절통은 보이지 않는다. 뛰어 본 적이 없는 나는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는 있어도 알 수는 없다. 통증 없는 성공이 있던가? 그림자 없는 빛이 있던가? 노트북 앞에 앉아 결승선 통과의 짜릿함만을 기대하는 심리는 일하지 않고 클릭 몇 번만으로도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가짜 뉴스에 속아 넘어가는 심리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인가?
전혀 아니다. 그렇다고 운동을 못하는 사람도 아닌 거 같은데…. 또다시 이유와 근거를 과거 속에서 찾으며 현재의 나를 합리화하려 한다. 어릴 때 수영부와 농구부와 배구부 코치님들이 집에까지 찾아와 나를 팀에 넣고 싶다고 설득했었다. 엄마는 예체능은 ‘돈’ 많이 든다고 하여 오빠와 언니와 동생을 모두 고려해야 하는 나의 끼어 있는 출생서열을 핑계로 번번이 거절했다. 형제들 사이에서 상대적으로 성적이 좋았던 나에게 엄마는 ‘공부’하라고 좋게 말했지만, 엄마의 속 마음을 이모들과의 대화를 엿듣게 되는 바람에 그 이후로 나는 예체능과 담을 쌓기는 했는데….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끼어 있는 자녀의 설움이 아니라 나의 운동 능력이다.
운동을 못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기꺼이 나서서 운동을 애써서 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체력을 키워야 할 필요가 있어 운동한 적은 있다. 한창 출장 다니면 일했을 때 틈만 나면 러닝 머신 위를 달렸고, 숲 속을 뛰어다녔다. 이 또한 얼마나 오래전 이야기 인지…. 동묘나 경동시장에서 동년배들 앞에서 ‘잘 나가던 때’를 내세우는 사람이 된 기분이다. 멋지게 완주는 하고 싶은데 훈련은 하고 싶지 않다니! 이런 저질 체력으로 무턱대고 달렸다가 응급차에 실려 가는 민폐를 범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운동은 머리로 하는 게 아니다.
뛰어 봐야 내 한계를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외국어 실력도 사실 문제집을 푼다고 되는 게 아니다, 실제로 외국어를 해야만 하는 상황에 내몰려야 하고, 그렇게 현장에서 실제로 한마디라도 내뱉어봐야 실력이 는다. 내 실력이 어디쯤인지, 내 한계는 어디까지인지 그걸 알아야 시작점이 생긴다. 외국어 처음 배웠을 때 레벨 테스트를 한다고 생각하면 마음의 부담이 줄어들까? 누구도 강요하지 않지만, 나 스스로 입문자 테스트를 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당연한 과정을 나는 여전히 책상에서 머리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있다.
얼마나 뛰기 싫으면, 얼마나 집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으면 이런 당연한 이야기를 이렇게까지 주절거릴 거냐고! 이제는 책상에서 모니터를 뚫어지게 보는 게 아니라 노트북을 덮고 이 집에서 나가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