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만 울게 될 것이다
Laugh, and the world laughs with you;
Weep, and you weep alone;
영화 <올드보이>에 나온 명대사로 잘 알려진 시구는
Solitude 고독 시의 첫 구절이다.
시 제목에서 알 수 있듯
고독과 외로움에 사무친 한 인간의 자조적인 명령이다.
이 시가 19세기에 쓰인 걸 보면
격변의 시대에 한 인간이 겪은 고통과 우울은
지금이나 그때나 별 다를 바 없는 거 같다.
세상의 모습과 패턴은 바뀌어도
인간의 본질과 본성이 바뀌지 않는 한
아마도 인간의 감정 또한 바뀌지 않을 것이다.
웃음과 미소를 잃어버린 나에게
하늘의 주문처럼 내면의 바닥에서부터
'웃어라'라는 내면의 명령이 떨어졌다.
이후 나는 웃기 위해서
나를 웃게 만드는 것들을 찾았다.
하지만 내가 찾아낸 것은 겨우 한두 개였다.
한 여아의 성장기를 담은 인스타와
아기 강아지 고양이의 유튜브 채널이 전부였다.
이들을 볼 때만
눈꼬리와 입꼬리가 미세하게 움직일 뿐이었다.
깔깔대고 웃은 게 언제인지 기억조차 없었다.
일상의 감동이 서서히 사라지면서 권태가 몰려왔고
권태로움은 무기력과 두려움으로 변했지만
자기 합리화에 빠진 게으른 나는
이 또한 자연스러운 것이라 생각했다.
언젠가 괜찮아질 거라는 기대와
'이런 것쯤이야 산전 수전 공중전까지 겪은 내가 '하며
오만스럽게 오랫동안 내면의 아우성을 무시했다.
가끔 우울한 기분이 표면으로까지 드러날 때면
인터넷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
우울증 진단 테스트를 여기저기 해보고
스스로 우울증이라 진단하고 또한 스스로 치유한다고
나는 병을 키우고 또 키우고 있었다.
우울한 기분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감기처럼 왔다 가는 병으로 생각해
이런저런 방식으로
그 기분을 인정하고 또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이렇게 크고 깊게 자리 잡은 우울한 감정이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는 걸 직감한 나는
우울을 극복하고자
'웃음'에 관한 글을 쓰겠노라 선언했다.
하지만 웃으려고,
웃음을 찾으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내면의 우물 바닥으로 깊게 빠져들어갔다.
코로나 우울이라며 스스로 진단 내고는
우스게도 다시 나를 채찍질했다.
코로나 이전과 이후 별다를 바 없는 내 일상에
무슨 우울증이냐며 혼자 중얼거리면서
퇴근길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받기도 했다.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약 처방도 받았다.
약의 장점과 단점을 설명 들으면서
나는 유독 약의 의존도와 중독성을 집요하게 묻고 따졌다.
의사에게 나는
두려움을 '앎'으로 극복하는 타입이라고 변명하면서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의사가 내 요구에 기분 나빠할 까 봐 이렇게 말했다.
타인의 감정에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하고
타인을 '눈치' 보는 마음의 습관은
앞으로 여러 상담을 통해 해결하자면서
의사는 친절하게 약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도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선무당 지식을 믿는지
감히 약을 먹지 못하고 있다.
이 또한 불안증세인 것을.....
머리로는 다 알고 있는 듯
검색과 문서를 동원하여 지식을 수집했지만
마음은 도통 움직여지지 않았다.
활자 정보를 읽는 순간만 안심이 되었을 뿐
책을 덮거나 검색창을 닫고 나면
관성의 법칙대로 우울의 한 복판에 빠져 있었다.
어쩌다 나에게
약 하나 먹는 게 이리도 어려운 일이 되었을까...
약을 먹을까 말까 지금도 고민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