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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설 Feb 16. 2024

오늘은 요리왕


  지난겨울, 한동안 마음이 울적했다. 이렇게 기분이 가라앉는 날에는 기분을 좋아지게 만드는 무언가를 해보곤 한다. 이를테면 평소와 다른 산책길을 찾아 걷는다던가, 재밌는 영화를 본다던가, 예쁜 카페에 가서 차를 마시고 온다거나 하는 식이다. 이는 인지행동치료에서 주로 사용하는 ‘행동 활성화 기법’ 이기도 하다. 흔히들 알고 있는 소확행과 비슷하다. 긍정적인 정서를 경험할 수 있는 작은 행위들을 해보면서 자연스럽게 우울감에서 빠져나올 수도 있고, 또 그때 느낀 성취감으로 인하여 다른 긍정적인 행동이 이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난겨울엔 평소 즐기던 산책을 해도, 영화를 보아도 기분이 나아지는 건 잠시뿐이었다. 그 활동이 끝나면 다시 우울한 기분이 찾아왔다. 열성적으로 좋아하고 잘하고 싶었던 심리상담 일이 크게 소진된다고 느꼈고, 그러고 나니 삶의 방향마저 잃은 것 같은 느낌이 든 탓이었다. 평소 좋아하던 활동들을 해봐도 기분이 크게 달라지지 않자, 실망감만 쌓여왔다. 


  그 날도 산책을 나섰는데 기분은 영 나아지지 않아 허탈한 마음만 들었다. 이 따위 산책이 무슨 소용 있나 싶은 마음에 발걸음을 돌려 다시 집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그때 집 근처 야채가게가 눈에 띄었다. 집에 가면 곧 저녁 시간인데 딱히 먹을 반찬도 없으니 채소라도 사가야겠다 생각했다. 가게에 들어서자 “자, 콩나물 이천 원”이라고 외치는 사장님의 힘찬 목소리와 함께, 신선한 채소를 고르며 “이거 한 봉지 주세요.”라고 말하는 손님들의 활력이 가득했다. 나는 그 중 제철 야채인 배추와 시금치를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사 온 배추로 배추 겉절이를 만들고 시금치는 무쳐서 나물을 만들기로 했다. 배추를 한 입에 들어갈 정도의 기다란 네모 모양으로 썰고, 한데 모아 소금에 절이기 시작했다. 삼십 분 정도 흐른 뒤 절여진 배추에 다진 마늘과 고춧가루, 액젓, 설탕 따위를 넣고 버무리면 배추 겉절이는 완성이다. 시금치는 다듬고 끓는 물에 잠시 데친 뒤 양념만 섞으면 끝. 집에 있던 계란으로 계란말이까지 만들어서 배추 겉절이와 시금치나물까지 한 끼 식사를 하고 나니 속이 든든했다. 남은 반찬들은 반찬통에 넣어서 냉장고에 넣어두니 마음도 든든해졌다. 며칠은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집 밥을 만들어먹는다는 건 사실 좀 귀찮게 느껴지기도 한다. 특히 혼자 밥을 먹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먹는 데는 몇 분 걸리지도 않는데, 그것보다 훨씬 더 긴 조리시간과 치우는 시간을 떠올리다보면 간단한 레토르트 제품에 손이 가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렇게 집 밥을 손수 해먹는다면 내가 나를 살뜰히 챙긴다는 느낌이 들어 뿌듯해진다. 밥을 챙겨먹는 작은 행위가 나 자신을 잘 챙긴 것 같은 뿌듯함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신기하게도 그날부터 조금씩 울적한 마음이 옅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된 까닭은 소진감 때문에 일을 조금 줄였고 휴식을 취하여 나아졌을 수도 있고, 혹은 행동 활성화 기법을 더 많이 사용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 그날 나 자신에게 손수 만든 음식을 대접하는 경험은 특별했다. 식사를 하는 도중, 어떻게 해야 잘 사는 건지는 모르더라도, 이렇게 밥 잘 챙겨먹고 잘 자면서 지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스쳤으니까. 내가 나 자신을 잘 보살핀다는 느낌을 받았으니까. 




해먹은 것들. 아보카도는 너무 물러지기 전에 샌드위치에 듬뿍.
에어프라이기를 사용했더니 시중 감자튀김보다 건강한 맛이 난다.
요리할 필요 없는 제철 과일먹기!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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