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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완완 Jan 06. 2023

어떤 진실은 약하나, 빛나서

우리 이미 완전한 존재들 2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막막했던 때가 있었다. 아예 우리나라에 있는 대학으로 방향을 틀자니, 주변 친구들의 전형적인 입시 코스를 밟은 게 아니라서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고, 직장을 가자니, 공부해온 것이 아깝고, 매일매일 정해진 일과처럼 내 미래에 대해 걱정하곤 했다. 다들 마음속이 직장, 학교, 가족에 대한 책임감으로 무거워 지구 위에 발을 딱 붙이고 멋있게 사는 것 같은데, 나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서 마치 속 빈 껍데기처럼 팔랑거리고 사는 것 같았다. 그게 창피했다.


 고민이 끝나고 나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일상이 지루했다. 학생이 아니니, 아침 일찍 일어나 학교 갈 준비를 하지 않아도 되고, 수업을 듣기 위해 억지로 책상에 앉아 있지 않아도 되었다.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니, 침대 위에 누워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는 시간이 늘어났다. 대학 가기 전에는 핸드폰을 만지지 않겠다는 나의 약속이 무색할 만큼, 영화나 유튜브를 보며 허송세월했다.


 하루, 이틀, 한 달, 그 이후부턴 집에 있는 게 눈치 보였다. 내 눈치를 보느라 차마 잔소리도 못 하는 부모님의 얼굴을 보기 그렇고, 이제 슬슬 어떻게 할 건지 말해보라고 혼을 내는 언니도 무서워서 돈도 많지 않은데 밖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래봤자 카페에 가거나, 도서관에 가서 책 읽는 게 다였지만, 그렇게 돌아다녀야 밤에 잠을 잘 수 있으니 억지로 밖을 나갔다.


 그날도 도서관에서 눈이 빠질 정도로 책을 읽은 후 잠깐 카페에 앉아 있는데, 문득 핸드폰 잠금 화면에 글귀가 보였다. ‘글을 읽든, 글을 써라. 하다못해 기도라도 해라.’ 그때 당시 쓰던 애플리케이션에는 1일 1격언이라고 해서 그런 식의 알림이 뜨곤 했다.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철학자가 했던 말이라고 했다. 글은 이미 읽고 있고, 기도는 교회에서든, 혼자 있든 하고 있고. 글을 쓰지는 않는구나. 다소 황당하지만, 그 이후부터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하나씩 적기 시작했다. 그냥 눈에 들어오는 것, 생각나는 걸 모조리 타이핑하는 식이었지만, 그래도 글을 쓰는 것은 색다른 재미가 있었다.


 어느 날, 교회 언니랑 근처 중국 음식점에서 함께 밥을 먹을 때였다. 그날  밥 친구였던 언니는 나보다 2살 많은 국문학과 학생이었다. 마음에 걱정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확 개인 듯한, 그런 상큼함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사유를 잘하고 누군가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잘 들어줬다. 잘 들어주는 거 이전에 신기하게 속마음을 끌어내는 힘이 있어서 만나고 나면 개운한 사람. 그래서인지 오래된 친구가 많았고, 오래된 연인이 있었다.


 그날 예배 이야기, 교회 찬양 반주 이야기 등 이야기를 즐겁게 하다가, 일상 이야기로 주제가 흘러갔다. 내가 대학생 앞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겠는가. 대화 주제가 빨리 다른 쪽으로 바뀌었으면 하는 바람에 그저 언니의 이야기에 가끔 장단을 맞추며 대강대강 듣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언니가 “나 너 알아. 네가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아니라는 거. 지금 분명 네가 무언가 하고 있다는 거 알아.”라고 하는 게 아닌가. 뭐라도 해야 한다는 말은 많이 들었어도,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말은 처음 들어봤기에 어안이 벙벙해졌지만, 그땐 언니한테 내가 지금까지 해온 것을 보여줘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핸드폰 속에 두서없이 쓴 조각 글을 보여줬다 그러자 언니는, “완아. 네 글 진짜 좋다.”라고 말하며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다고, 꼭 읽어보고 싶다고 했다. “빈말 아니야. 네 글 꼭 읽고 싶으니까 카카오톡으로 보내줘.”라고 뒷말을 보탰다.


  꽤 꾸준히 글을 써서 보내줬다. 언니는 글이 좋다는 이야기 말고도, 조금 더 유려하게 글을 쓰는 방법을 알려주거나, 시나 소설로 답하기도 했다. 나는 학교 과제 때문에 알아듣기 힘든 영문학 시를 읽어야 해서, 시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피천득 시인의 ‘서영이에게’는 아름다웠다. 문학은 알아들을 수 없는 감정적, 형이상적인 표현의 나열이라고 생각했는데, 관찰하듯, 묘사하듯 쓴 글이 마음을 울리는 것을 경험하며 문학에 대한 편견이 깨졌다.


 이 시간을 계기로 내가 갑자기 국문학에 관심이 생겨서 미친 듯이 공부하고, 대학에 입학하고, 인생이 착착 풀렸던 건 아니다. 고민은 미제였지만, 내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충만해졌다. 그전까지 지금 내 인생을 누가 찍어서 비디오로 남긴다면 무채색의 화면만 나온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쓴 글을 언니가 읽고 좋아할 때마다 그 빈 화면이 형형색색으로 채워진 기분이었다.


 만약 고이 간직했던 글을 꺼내 보여줬을 때 언니가 “그런데 너 지금 이런 거 할 때야?”라고 이야기했다면 나는 아마 글쓰기조차 포기했을 것이다. 아마 수치스러워 쓰지 못했겠지만, 그날 두서없이 드러낸 나의 서툰 진실을, 언니는 편견을 갖지 않고 그대로 봐주었다. 글을 처음 써봤기에 거짓말을 적당히 섞는 방법도 몰랐다. 그저 내 마음을 그대로 썼다. 그리고 사실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솔직한 이유는,  내가 시간이 남아도는 한량이어서가 아니라, ‘나도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이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매몰될 사람이 아니란 말이야.’였을 것이다. 그 진실을 언니는 다 읽어줬다. ‘그래. 너는 그런 사람이야. 너는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야.’ 그게 갈피 못 잡고 팔랑대는 나를, 지구 위에 단단히 발붙이고 살아가게 만드는 끈이 되었다.


 누구에게나 꽁꽁 숨겨진 진실이 있다. 다 큰 어른이든, 아이든 상관없다. 그건 너무 진실이라, 드러내기 부끄럽고, 아무도 몰랐으면 하지만, 결국 그 진실이 나의 초석이다.  그리고 누구나 그 진실이 빛나고 귀하다는 위로는 꼭 필요하다. 나는 그 언니로부터 그 위로를 받았다.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분, 그리고 마음 깊은 곳의 진실을 드러내길 주저할 미래의 나에게 위로를 던지고 싶다. 당신의 진실, 그리고 나의 진실은 세상 무엇보다도 빛난다. 빛나다 못해 찬란하다. 그러니 가감 없이 드러내시길. 응원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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