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T다. 아니 T였다. 아내가 힘든 점을 이야기해도 공감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 사람 나름의 사정이 있었겠지’ 등으로 공감보다는 상황을 파악하고 객관화시키려 한다. 내가 진단하기에 이건 참 병이다. 누군가 아파도 공감하기보다는 아픔을 경감시킬 방안을 머릿돌을 부단히 굴린다.
엄마의 아픔은 이런 나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이젠 주변에 가족이 아프다고 하면 나도 마음이 아프다. 한 번은 지인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는 데 너무 마음이 아팠다. 예전 같으면 기계적으로 힘듦에 조의를 표하며 조문을 갔겠지만, 엄마 사건 이후로는 다르다. 조문을 가는 길에서 조차 눈물이 날 만큼 누군가의 아픔에 깊이 공감한다.
MBTI는 마이어와 브릭스의 type indacator의 약어로 성격유형지표다. 실제 성향보다 사회적으로 드러나는 성격을 검사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는 걸로 기억한다. 실제로 그렇게 쓰이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이해하기로는 그렇다. 어쨌든 이 성격이라는 것은 사회적 학습, 인격의 성숙에 의해서 발전되고 확장되고 조정되어 가는 것 같다. 방향이 옳든 틀리든 어느 쪽으로든 진화해 간다. 나는 지금의 시간들을 통해서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게 되어 참 감사하다. 가끔 너무 기계 같은 내 모습이 조금 아쉬웠다. 인위적으로 F가 되고 싶어 책을 통해 이해하려 시도하고 했지만 잘 안 됐다. 그런데 원치 않는 사건으로 F로 거듭? 난 것 같다.
T가 F로 가는 과정은 단순한 닫혀있던 감정의 호르몬이 폭포수처럼 흐르게 되는 과정이 아니다. 누군가 힘들 때 그 힘듦의 이해 폭이 커 저야 한다. 그 사건으로 인해 정신적 육체적 고통과 인내의 여정이 얼마나 고된지를 체험하고 익혔을 때 비로소 아픔을 알 수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사람들이 얘기하는 것 같다. 당해보지 않고는 모른다고. 맞다. 당해봐야 안다. 최선의 방법이 아닐지는 모르는데 이것만 한 배움의 현장이 없다.
이제는 안다. 부모의 병원비를 홀로 감당해야 하는 힘듦도 알고 이를 도와줄 수 없는 가족들. 그리고 방관하는 수많은 친척들의 존재에서 느껴지는 박탈감, 세상에는 나밖에 없고 가족을 빼고는 다 필요 없다고 느껴지는 각박한 세상. 그리고 가족이 아플 때 나마저 아파서 놓아버리고 싶을 때. 이 상황을 가장 지지받고 싶은 사람에게조차 지지받을 수 없을 때의 낙심됨, 물질적 부족의 원망, 약간의 소득이 있다고 아무것도 지원해주지 않고 오직 책임만 물리고 있는 정부에 대한 분노,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런 상황에 부재함을 느끼는 신에 대한 배신감 이제는 다는 아니어도 조금은 알 것 같다.
이 과정을 겪고 비로소 나도 측은지심 획득했다. 결코 지불할 의사가 없던 값비싼 대가였지만 더불어 살고자 하는 나의 인생관에서 반드시 필요했던 선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