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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 Nov 13. 2019

아가씨 소리가 그리 좋더냐

'두 아이의 엄마라고 믿기지 않는 동안' 아니어도 괜찮아

의심은 시작하기가 잘못이었다. 의심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나는 스스로 느끼고 생각하기 위한 나인가, 남이 어떻게 느끼고 남이 어떻게 생각하나에 비위 맞추기 위한 나인가? 매력 있는 여자란 무얼까? 나는 왜 매력 없는 여자란 소리를 가장 두려워하는가? 나는 매력 있는 여자이고자 끊임없이 자신을 변경시켜왔다. 앞으로 어디까지 자신을 변경시킬 수 있을까?      -박완서, <살아 있는 날의 시작>


그러니까 7-8년 전이 마지막이다. 내가 '아가씨'란 소리를 들은 게. 아이들을 유치원에 갈 만큼 키워놓고 비정규직이나마 일을 다시 하게 됐을 때다. 새벽같이 일어나 안 하던 단장을 하고 택시를 타니 아저씨가 물었다.


"아가씨, 어디로 가세요?"


요즘은 어떤 경우에는 아가씨란 말이 오히려 실례가 되기도 하고 '예쁘다'라고 한 택시 기사에게 함부로 외모 평가를 했다고 항의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던데 난 그때 아가씨란 호칭에 정신 못 차리게 좋았다. 대학생, 아가씨, 직장인으로 살다 임산부, 애 엄마, 애 둘 엄마로 변하면서 너무 잦은 무시와 홀대를 경험했기에 아가씨란 호칭은 나를 원점으로 돌려놓는, 기분 좋은 주문 같았다. 재취업에 성공해 출근하는 첫날 기사 아저씨에게 들은 '아가씨'란 말은 앞으로의 직장 생활이 평탄하고 보람 찰 거라는 암시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30대 중후반까지만 해도 그렇게 잘 차려입고 나가면 아가씨 소리를 가끔 들었다. 그런데 나이는 하나씩 드는 게 아니라 어느 순간 한꺼번 드는 거였다. 마흔을 훌쩍 넘기면서부터 눈 씻고 찾아봐도 아가씨 같은 구석은 없어졌다. 첫 출근하며 택시기사에게 아가씨 소리를 들었던 그때 남편에게 자랑을 했다. 남편은 '이른 아침이라 어두웠나 보다'라고 말했는데 이제 아무리 어둑어둑한 곳에 있어도 실루엣에서 이미 아가씨로 보이긴 틀렸다.


예전에 친정 엄마가 늙으니까 사진도 찍기 싫다고 했던 말이 실감 났다. 사진 속에서 '젊음'이 사라진 나를 확인하는 건 우울한 일이었다. 걸핏하면 옛날 사진을 찾아내 카톡 프로필에 추억 소환하는 척하며 올려놓거나 아이들에게 '엄마 옛날 사진이랑 지금이랑 얼마나 달라''어디가 제일 많이 변했어'라는, 대답하기도 곤란한 질문을 해댔다.


자글자글 시들지 않고 갑자기 툭 떨어지는 동백꽃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젊음이 내 얼굴에서 어느 날 툭 사라지니 서글펐다. 대단한 페미니스트는 아니어도, 페미니즘은 휴머니즘으로 가는 길목에서 만날 수밖에 없는 이념이라고 늘 생각하며 관련 책도 수시로 읽고 여성을 둘러싼 여러 현실을 통찰하는 데 공을 들여왔건만 나이 든 내 얼굴을 거울 속에서 마주 보는 건 쉽지 않았다.


매스컴에 하루가 멀다 하고 등장하는 단골 제목이 있지 않은가. '두 아이의 엄마라고 믿기지 않는 동안', '두 아이의 엄마인데도 철저한 자기 관리로 가꾼 몸매', '출산 후에도 변함없는 아름다움' 등등. 출산과 육아를 거치며 여성의 육체가 늙어가는 건 필연적인 건데 이 대자연의 섭리를 개인의 노력으로 극복한 사례가 항상 아름답게 포장된다. 주로 연예인이나 재벌가 사람들을 언급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제목이니 그들이 어떤 관리를 얼마나 받을지 구체적으로는 몰라도 상상은 된다. 그들 만큼 관리받고 살지 않는 내 얼굴과 육체에 세월의 흔적이 새겨지는 건 당연한 건데 건강 관리와는 별개로 내가 부족한 사람이 된 듯한 열등감은 왜 느끼는 걸까.



작은아이는 대학 동창들이 누굴 닮았냐고, 너는 확실히 아닌 것 같다고 놀릴 만큼 꽤 예쁘게 생겼다. 가게 점원이나 심지어 지나가는 행인한테도 '어머, 참 예쁘게 생겼네' 소리를 자주 듣는다. 아이가 예쁘다는 소리를 들으면, 내가 물려준 유전자 덕도 아닌네 은근히 어깨가 으쓱했다. 이러다 어디 기획사에서 연락이라도 오는 거 아닐까 턱없는 기대도 했다. 아이는 어릴 때는 이런 칭찬에 어색하게 씩 웃더니 이제 익숙한 듯, '고맙습니다라고 인사도 한다. 한번은 아이에게 물었다.


"00야, 예쁘다고 하면 기분 좋아?"(예쁜 애들은 어릴 때부터 예쁘다는 소리를 이렇게 많이 듣는구나, 경험해 보지 않아서 신기하다.)

"어.... 처음에는 좋았어."


처음에는 좋았다니? 의외였다.

"그럼 지금은 안 좋아?"

"안 좋다기보다.... 뭔가 불안해. 예쁘다는 말을 안 들으면 오늘 내가 뭔가 이상해 보이나 신경 쓰이기도 하고. 또 만약 내가 예쁘지 않다고 생각해도 이 사람이 나한테 이렇게 잘해줄까? 의심하는 마음도 들어. 그리고 가끔은 엄마도..."

"엄마도 뭐?"

"아냐. 그냥 그렇다고."


엄마도 다음에 하고 싶은 말은 뭐였을까? 예쁜 액세서리를 달고 다니는 것마냥 자기 딸의 미모에 우쭐한 엄마를 아이는 간파한 것인가? 엄마도 내가 예쁘지 않다면 지금만큼 사랑해주지 않을 것 같다고 느낀 것일까? 좀처럼 속마음을 다 표현하지 않는 아이라서 이런저런 짐작만 해볼 뿐이었다. 어쨌거나 아이에게 나도 모르게 '예뻐야 한다'는 부담을 주고 있었던 건 아닐까 생각하니 비로소 정신이 번쩍 났다. 아무리 자본주의 셈법에서는 외모도 값이 매겨지는 상품이라지만 어릴 때부터 외모가 일정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는 부담을 평생 안고 사는 아이의 삶은 어떨까? 시대가 변했다지만 외모와 관련해서 여자에게 더 많은 의무를 지우는 건 여전하니 말이다.




굳이 탈코르셋까지 가지 않더라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외모가 큰 기준이 되어 버리면 사는 게 참 힘들어진다. 당연한 주름도 끊임없이 보톡스든 뭐든 시술을 받으며 펴줘야 하고 약간의 나잇살만 붙어도 젊음을 다 잃은 것처럼 호들갑스러운 낭패감을 느낀다. 오랜만에 만나는 동창들이 내 동생처럼 보일까 걱정돼 피부 탄력을 회복하도록 급하게 관리라도 받아야 하는 건가 초조해진다.


나답게 사는 게 대세인 요즘 같은 때, 눈가 주름이 보일까 맘 놓고 웃지도 못하는 신세라니. 늙어가는 게 서글픈 게 아니라 늙는 걸 감추려고 전전긍긍하는 게 더 서글픈 거 아닐까.


이제 나는 편하게 애 둘 엄마라고, 40대 중년이라고 믿기는 얼굴로 살고자 한다. 남에게 불쾌감을 줄 만큼 단정하지 못하게 하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나이를 애써 감출 이유도 없다. 도리언 그레이처럼 대신 늙어줄 초상화가 있는 것도 아닌 바에야 시간의 자취가 육체에 드러나는 건 당연한 이치다. 꽃이 지고 계절이 바뀌는 그 순리를 돈의 힘을 빌려 거부하는 건 잠깐의 만족감은 줄지언정 더 큰 공허함을 불러올 수 있다.




아이에게도 더 이상 예쁘다는 칭찬은 함부로 하지 않는다. 무심코 예쁘다고 말하면 이제 아이가 꼭 물어본다.


"응, 이 옷 입으니 예쁘지? 근데 엄마가 나 못 생겨도, 안 예뻐도, 상관없댔지? 확실한 거지?"

"그럼! 예쁘고 안 예쁘고가 중요한 건 아냐. 그냥 너인 게 중요한 거야!"

젊음이 곧 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젊지 않다고 해서 내가 아닌 것도 아니고, 젊은 외모가 사라졌다고 내 가치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날씨도 좋은데 모처럼 아이랑 햇볕을 받으며 셀카라도 찍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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