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폭식 연대기

굿바이, 요요

by 밍이

아주 어릴 때에는 잘 먹지 않는 아이였다고 한다.


내가 기억하는 때부터 나는 잘 먹었다. 먹는 양은 적은 편이지만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골고루 먹었다. 칭찬받기 위해서였다. 식도락가였던 아빠는 다양한 음식을 맛보는 것을 좋아했다. 입 짧은 동생과 달리 나는 아빠가 주는 것이면 뭐든 잘 받아먹었고, 그때마다 아빠는 흐뭇해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던가. 해삼을 보고 동생은 징그럽다며 도망갔지만, 나는 아빠가 초고추장에 찍어 내미는 것을 날름 받아먹고는 맛있다고 말했다. 사실 그때에도 속으로는 '맛있지는 않은데... 먹을 수는 있지만 먹고 싶지는 않은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아빠가 원하는 딸이 되고 싶었던 나는 그런 생각을 애써서 지워버렸다.


중3 때부터 음식에 대한 집착이 시작되었다. 당시는 매우 힘든 시기였다. 전교 1등이었던 나에게 학교에서는 개교 이래 첫 특목고 합격을 기대한다며 온 선생님이 부담을 주었고, 집이 서서히 망해가기 시작하는 것을 피부로 느끼면서 엄마, 아빠의 유일한 버팀목이 되어야 한다는 압박감도 심했다.


나는 쉴 수가 없었다. 우울증으로 머리가 무뎌져서 아무것도 집어넣을 수 없음에도 책상 앞에서 떠날 수가 없었다. 유일하게 죄책감 없이 쉴 수 있는 때에는 간식을 먹을 때였다. 잘 먹어야 공부할 수 있다고, 이것도 공부에 필요한 활동이라고 스스로를 속이면서, 끊임없이 뭔가를 먹었다. 중1 때 롯데리아 햄버거 하나를 다 못 먹을 만큼 위가 작았는데, 중3 때에는 앉은자리에서 투게더 한 통을 해치웠다.


다른 즐거움을 모르기도 했다. 나는 취미가 없었다. 그 나이 또래 애들이 가수의 앨범을 모으고, 만화책이나 할리퀸을 돌려볼 때에 나는 그것들이 공부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스스로 금지했다. '네가 지금 이런 거 할 때야? 합격하고 해도 충분해.'라고 나를 몰아세웠다.


소설을 읽는 것은 어릴 때부터의 취미였지만, 다른 책도 아니고 '중학생 권장도서'인 고전문학책을 쉬는 시간에 읽고 있다가 학년주임이 와서 "네가 지금 (공부 안 하고) 이런 거 읽을 때야?"라고 말한 뒤에는 그마저도 못하게 되었다. 어쩌다 음악을 들을 때에도 머리가 맑아진다는 클래식만 들었다. 나는 스스로에게 즐거움을 찾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photo by toa-heftiba on unsplash


첫 다이어트는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대학 가면 살 빠진다더니, 다 거짓부렁이었어! 입학하고 첫 학기 동안 온갖 과모임에 쫓아다니며 안주발을 세우던 나는 결국 앞 자릿수가 바뀌는 기염을 토하고야 말았다.


고3 때보다 더 뚱뚱해지면 어쩌자는 거야. 아득해진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대학 가면 살이 (저절로) 빠지는 게 아니라 빼야 되는 거구나. 살을 빼야 남자 친구도 생기고 낭만적인 캠퍼스 라이프를 영위할 수 있을 거야.


여름방학 때 작정하고 다이어트에 돌입했다. 이때의 나는 무모하게도 다이어트가 '특정 기간 동안에만 먹고 싶은 걸 참고 운동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단식할 깜냥은 안 되었지만, 그동안 내 삶의 위로와 기쁨을 주었던 치킨, 피자, 탕수육, 초콜릿, 쿠키, 아이스크림 등과 몇 달 뒤에 다시 만나자며 작별을 고했다.


수영 새벽반을 등록하고, 저녁에는 사과 반 쪽과 삶은 계란 등 평소에 쳐다보지도 않던 음식들을 간에 기별도 안 가게 뱃속에 집어넣은 뒤 그저 허기를 참고 또 참았다. 결국 2학기 개학 전에는 꿈에 그리던 몸무게를 달성하게 되었다.


2학기는 행복했다. 짜잔~ 하고 변신한 모습으로 학교에 가자 동기들은 모두 놀라 입을 벌렸다. 여자들은 부러워했고, 남자들은 묘하게 친절해졌다. 불과 지난 학기만 해도 내 뒷자리에 앉은 남자애가 농담이랍시고 '니 등판에서 고스톱을 쳐도 되겠다'며 웃었는데. 지나가다가 난생처음 헌팅이란 걸 당한 날에는 흐뭇해서 치솟은 광대가 자기 전까지 내려오지를 않았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빼긴 뺐는데, 도대체 어떻게 유지해야 하는 거지? 학교를 다니면서 다시 각종 모임들과 술자리들이 이어졌고, 그 속에서 식단을 유지하기란 버거운 일이었다.


아니 애초에, 언제까지 사과 반 쪽에 계란 하나 먹으면서, 어떤 날은 삼시세끼 강냉이만 먹으면서 살아야 되는 거야? 가끔 예전에 먹던 대로 먹은 날에는 뒤이어 어김없이 체중계의 눈금이 올라갔다. 혹시 평생 이러고 살아야 하는 건가?


점점 우울해졌다. 항상 머릿속에서는 탕수육이 둥둥 떠 다니고, 코 끝에는 델리만쥬 냄새가 풍겨왔다. 먹고 싶은 것을 참는 것도 힘들었지만, 몸이 다이어트 식단에 적응해 버린 것이 더 큰 일이었다. 완벽한 식단을 지킨 날에도 체중은 제자리였고, 조금만 먹으면 살이 쭉쭉 올라왔다. 허기가 지니 매사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그렇게 간신히 참아내던 어느 날, 식탁 위 반찬통에 담긴 조미김을 보았다. '김은 살 안 쪄. 한 장만 먹을까?' 김을 한 장 꺼내어 입 안에 넣자 혓바닥에 짭짤한 소금이 닿았다. 삽시간에 온 몸으로 맛이 퍼졌다.


그때부터 정신을 놓고 먹기 시작해서 결국은 마지막 한 장까지 먹어치우고야 말았다. 김 같은 거 원래 좋아하지도 않았는데. 텅 빈 반찬통을 끌어안고 있는 내 모습이 거울에 비쳤다. 너무 한심해서 울고 싶은 지경이었다. 그렇게 고삐 풀린 겨울, 나는 다시 원래의 몸무게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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