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방에 감초'라면 주방에는 대파가 있다. 요리책에서 말하는 '갖은양념'의 기본은 파, 마늘이며, 거의 모든 국물 요리의 말미를 장식하는 것도 대개가 파다. 이처럼 쓰임이 많은 식재료지만 어지간해선 손질된 대파를 사지 않는다. 손질 과정에서 생기는 파뿌리와 겉잎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양파도 마찬가지다. 손질 양파를 사자니 양파 껍질이 운다. (저... 죄송하지만, 이왕 손질해 주시는 거, 파뿌리와 겉잎, 양파껍질까지 살뜰하게 챙겨주실 순 없나요?)
대파를 베란다에 두고 먹어도 괜찮을 정도로 서늘한 날씨지만, 이파리가 하나 둘 시들어가는 게 마음이 쓰여 결국 대파 한 단 손질을 시작했다. 대파를 다듬어 누런 이파리는 버리고 상태가 썩 괜찮은 겉잎은 따로 모아 세척한다. 물기가 얼추 빠지면 당장 육수 내는 데 소용되는 분량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냉동실에 보관한다. 언제든지 육수 우릴 때 사용할 수 있도록 말이다.
겉잎을 떼어 낸 대파를 가볍게 씻은 후 채반에 받쳐 물기를 뺀다. 흰대에서 푸른대 방향으로 씻어 끝이 잘린 푸른 대 속으로 물이 들어가지 않게 한다. 저장 용기 크기에 맞추어 대파를 자른다. 저장 용기 밑바닥에 키친타월을 깔고 대파를 얹은 다음 맨 위에 한번 더 키친타월을 올려 뚜껑을 덮는다. 이렇게 담은 대파는 냉장 보관한다. 미처 용기에 들이지 못하고 남은 푸른대는 듬성듬성 썰어 냉동보관한다. 냉장실에 들인 대파를 다 먹은 후 먹을 참이다.
대파 손질, 여기서 끝난 게 아니다. 개수대 한편에서 흙이 덕지덕지 묻은, 보기만 해도 심란한 대파 뿌리가 찬 물에서 떼를 불리고 있다. 세척이 만만찮은 뿌리라 한 숨 크게 고른다. 이걸 꼼꼼히 씻어 뽀얗게 만들자면 내 머리도 하얗게 세어버릴 테지.
파뿌리를 씻으며 생각한다. 주례사의 정통 멘트가 돼버린,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산다는 것은 얼마나 고되고 오랜 세월이 걸리는 일인가, 하고 말이다. 개운하게 몸을 씻은 파뿌리가 창으로 드는 햇살에 얌전히 몸을 말린다. 파향이 집안으로 스민다. 코끝을 자극하는 알싸한 향이 꼭 견딜만한 초겨울의 추위 같다. 본격적인 추위를 앞두고 먹이를 모으는 동물과 같이 살림을 사는 나도 올 겨울 식구들을 살릴 채비를 한다. 그래서인지 이 계절엔 살림살이가 더욱 실감이 난다.
대파 한 단을 손질하는 날은 우리 집 육수 내는 날이다. 멸치, 다시마에 따로 모아둔 대파 겉잎과 파뿌리, 양파 껍질을 넣고 육수를 우린다. 냄비에 온기가 오르고 기포가 차오르기 시작하면 가슴이 두근댄다. 타이밍을 놓쳐선 안 될 일, 육수 위로 뜨는 거품을 말끔히 걷어내야 한다. 이게 다 뭐라고 긴장감이 돌며, 이토록 가슴 뻐근하도록 뿌듯하냐 말이다.
파 손질과 육수 내는 일을 마치고 나면 비로소 근거 있는 자신감이 생긴다. 그 날 이후로 '파 많이 요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를테면 '파 많이 곰국', '파 많이 계란말이', '파 많이 볶음밥', '파 많이 떡볶이', 그리고 '파 많이 청국장' 같은 거. 대파는 엄연히 채소 중 하나다. 우리 집 식탁에서 제법 주연 노릇을 한다. 단순히 국물 요리에 감칠맛을 더하기 위해 막판에 한 줌 넣어주는 고명의 역할, 그 이상이다.
양껏 우려낸 육수는 모든 국물 요리에 요긴하다. 파와 자투리 채소를 넣어 우린 육수는 감칠맛이 더하고 깊은 맛이 난다. 무슨 국을 끓이든, 어떤 찌개를 즉석에서 떠올린다 해도 양질의 육수를 붓고 우르르 끓여낼 수 있으니 이보다 확실하고 믿을만한 집밥의 베이스가 또 있을까.
솔직히 대파 한 단 손질은 녹록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번 이 수고를 자청하는 이유는 뭘까? 영민한 주부가 못 돼서, 그게 아니라면 품에 대한 대가가 제법 쏠쏠해서일 것이다. 혹은 둘 다거나.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대파 한 단이 오래도록 식탁을 풍요롭게 한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