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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정 Oct 18. 2022

제대로 즐기는 방법

피아노 치는 남자  / 아이의 연주회와 미켈롭가이 

평생 기억하고 싶은 순간은 눈에 담는 게 좋을까? 
잘 찍은 사진에 담는 게 좋을까?

중요한 순간에 핸드폰을 꺼내 들고 사진 찍기를 시작하는 걸 보면 난 이미 사진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싶지만, 그래도 가끔 눈과 마음에 담아야지 할 때도 있다. 기억은 생각보다 오래가지 않을 때가 많아 사진이 낫겠다 싶으면서도, 또 어떨 때는 그럴듯한 사진과 달리 실제로는 별 일이 아닌 경우도 있고. 

얼마 전 첫째 아이의 피아노 연주회가 있었다. 지난 겨울에는 연주회를 하지 않겠다고 한사코 손사래 치더니, 연주회를 일주일 남겨놓고 리허설하는 친구들 모습에 자기도 하고 싶다며 눈물을 뚝뚝 흘렸던 아이다. 어쨌든 그게 동기가 되어 지난 3월에 곡을 받아 장장 5개월 동안 준비한 바로 그 연주회가 지난 토요일이었다. 


아들이 연주한 곡은 바흐 미뉴에트. 처음엔 이걸 칠 수 있나 싶었는데, 그래도 몇 달 준비하며 곡을 칠 수 있게 되자 아이는 피아노에 조금 더 흥미를 느끼는 듯 싶었다.

연주회 날, 남편과 나도 꽤 설레어 아침부터 부산을 떨었다. 연주회 장소에 일찍 도착해서 앞자리도 맡았다. 혹여 무대가 멀어 사진이 잘 나오지 않을까 봐 걱정도 해가며. 나는 사진을 찍을 테니, 남편은 동영상을 찍으라고 각자 역할을 나눴고 다른 아이들 순서에도 어떻게 찍을까 각도를 잡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일곱 번째로 무대에 오늘 아이는 긴장하고 있었다. 당연히 그랬겠지. 허리 숙여 인사를 하고 의자에 앉아 연주를 시작했을 무렵, 나는 아까부터 들고 있던 휴대폰 카메라의 셔터를 연신 눌렀다. 아이가 입장할 때 한 컷, 인사할 때 한 컷, 연주하는 동안에도 계속 사진을 찍었다. 


어두운 공연장에서 핀 조명 하나가 아이를 비추고 있으니 사진이 잘 나오기가 쉽지 않았다. 이렇게 찍어보고 저렇게 찍어보고 아 별로네, 그냥 카메라를 갖고 올 걸. 남편 보고 사진을 찍으라고 할 걸 그랬나. 내가 똑같은 사진 수 십장을 찍는 동안 아이 연주가 끝났다. 그렇게 아이의 첫 연주회가 끝이 나고 말았다.

"오빠, 지안이 연주 잘했어? 나 사진 찍느라 연주를 못 들었어"
"아니 똑같은 사진을 뭘 계속 찍고 있어?"

그러게 말이다. 아들이 임윤찬도 아니고, 긴장해서 움직이지도 않고 피아노를 치고 있어 사진 몇 장이면 되는데 나는 뭘 그렇게 찍고 있었던 거지? 아이가 초반부 실수를 해서 처음부터 다시 연주를 시작한 것 말고는 아이의 연주가 기억나지 않아 다른 아이들 연주를 들으면서도 내내 속이 상했다.

결국 아들의 연주는 연주회가 끝나고 집에 돌아와 남편의 핸드폰 속 동영상으로 감상했다. 아이 인생의 중요한 순간을 사진으로 남겨두고 싶었는데, 내 인생의 중요한 순간을 휴대폰 속 영상으로 감상하는 상황이 돼버린 것이다. 

얼마 전 타이거 우즈의 골프 경기에서 유명해진 한 남자가 있다. 2022년 5월 PGA 챔피언십 2라운드에서 타이거 우즈가 갤러리 가까이로 오자,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경기하는 그의 모습을 촬영하기 위해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모두가 스마트폰으로 타이거 우즈의 경기를 촬영하는 상황에서 한 남자만이 스마트폰이 아닌, 맥주 캔을 들고 다소 경건하기까지 한 자세와 표정으로 경기를 지켜봤다. 이 장면을 담은 사진과 동영상은 소셜미디어에서 화제가 되었다.


그가 들고 있던 맥주 회사(Michelob)는 '미켈롭 가이'란 별명을 얻은 마크 라데틱이라는 남자를 찾아내 광고 모델로 계약하고 'It's only worth it if you enjoy it'이라는 슬로건과 함께 광고를 제작했다. 그의 사진이 담긴 맥주와 티셔츠, 모자가 출시되기도 했다. 마크 라데릭은 그날의 상황에 대해 다만 자신은 스마트폰에 익숙하지 않았고, 그저 그 순간을 눈으로 즐기고 싶었을 뿐이었다고 말했다.


요즘 사람들은 중요한 순간을 사진이나 영상으로 남기는데 꽤 열심이다. 핫플을 즐겨가는 지인도 요즘 젊은이들은 사진을 백장 정도가 아니라 진짜 천장씩 찍는다며 세대 차이를 느낀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 (물론 그게 그들의 문화겠지)

타이거 우즈의 경기를 그렇게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상황이라면 일단 카메라에 담아 두고두고 보는 게 어떤 개인에겐 더 높은 만족감을 줄 수도 있겠다 싶지만, 많은 이들이 마크에게 열광했던 건 분명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게 있어서가 아닐까?

아들 연주회를 보러 갔다가 직관을 하지 못한 아쉬움을 이렇게나 길게 주저리주저리 적어보았다. 속상해도 연주회는 이미 끝났고, 동영상을 플레이해놓고 눈은 직관했다는 남편도 있으니 그저 내가 미숙했음을 인정해야겠다. 그나마 내가 찍어온 사진까지 저퀄이라 매우 마음이 쓰리다.

첫 번째 연주회를 하고 난 뒤 아이는 아쉬움이 남는지 집에 돌아와서도 몇 번 더 연주곡을 쳐보았다. 그리고 다음 연주회 때는 더 연습해서 잘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피아노 그만둔다는 소리가 일단 안 나왔으니 그걸로 됐다. 나는 이번 연주회를 통해 아이가 피아노에 그리 재능이 있는 건 아님을 깨달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피아노를 오래 즐겨 쳤으면 좋겠으며, 다음 연주회 때는 남편에게 사진을 맡기고 내 눈은 아들의 연주회에 집중해야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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