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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프리 yefree Jul 19. 2022

독일인 할아버지가 내게 열 손가락을 보여준 까닭



독일인들은 아마 나를 보고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생각했을거다. 기차 안에서 ‘보훔역’을 중얼중얼 되뇌고 또 되뇌었다. 보훔 역임을 알려주는 안내방송을 놓치지 않겠다는 필사적인 의지였다.


하지만  멀티플레이어가 아니다.  앞을 지나가는 행인에게 길을 비켜주고, 화장실이 어디냐 묻는 말에 대답해주느라 도착지를 지나고 있는지 몰랐다. 예상 도착 시간이 훌쩍 넘겨서야 내릴 타이밍을 놓쳤다는  깨달았다. 마음에 드는 이성이 있어 번호를 묻기 위해 “원래 저번 역에서 내렸어야 했는데 그쪽 때문에  내렸어요 같은 고전적인 핑계도 아니거니와, 어이없게 역을 놓쳐버린  자신이 한심했다.


일단 아무 역에서 내렸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 거기  있던 독일인에게 다가가 최대한 예의 바르게 물었다. 혹시 보훔 가는 길을 아세요? 그런데  보는 눈빛이 무슨 생선가게에 들아온 고양이를 보듯 한껏 경계하는 눈치가 아닌가. 아니, 나보다 키는 곱절이나  커보이는구만. 내가 그쪽을 해코지하게 생겼어요?  달라하는  더더욱 아니거든요!’ 나의 순수하고 절박했던 심정이 폄하당하는 느낌이 들어,  이상 물어보기 겁났다.


혼자 지도를 보고 유추해서 아무 기차나 타고 20분쯤 타고 가던 중이었다. 역무원 두 명이 다가와 표를 보여달라고 했다. 이 기차는 그리로 가지 않으니 내려야 한다고 했다. 원래는 무임승차와 다름없으니 벌금을 부과하는 게 맞지만 역무원들은 나를 순순히 내보내줬다. 자기 덩치만 한 큰 캐리어를 이끌고 반쯤 넋이 나간 듯한 외국인을 본능적으로 피해야겠다 생각한 걸까?


Photo by Eduardo Soares on Unsplash


20 만에  거리를 장정 4시간을 헤매어 드디어 보훔 역에 도착했다. 솔직히 말하면 어떻게 왔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재미없는 부분은 통편집 당하듯,  뇌에서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통으로 삭제한 것이 틀림없다. 사실 보훔 역에서 기숙사까지는 우반(독일 지하철)으로 얼마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길을 잃게 될까  안전하게 택시를 타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당장 수중에 현금이 없으니 ATM 찾아야 했다. 아니, 그런데  ATM 거기에 있어요?


ATM 역의 거의 중앙에 위치했다. 너무 프라이버시가 지켜지지 않은 위치 아닌가?  한국에서조차 돈을 인출할   강도가 와서  돈을 뺐어가진 않을지 혼자 007 작전을 찍는 사람이다. 하물며 유럽이라니. 소매치기가 하도 많다는 얘기를 들어서 잔뜩이나 긴장했다.  손으론 캐리어를  잡고 ATM 기계에 몸을  붙였다. 빛의 속도로 빠르게 돈을 뽑고 가야 되는데,   배경이요 검은  글자요. 제발 빨리 되라 ...! 그런데 갑자기  오른편에서 뭔가 모를 인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앍!!!!아저씨 제가 더 놀랬잖아요!!!!


하마터면 너무 놀래 뒤로 나자빠질뻔했다. 발소리도  내고 언제 이리 가까이  건지.  주머니가 많이 달린 조끼를 입은 독일인 할아버지가 서있었다. 내가 전전긍긍하는  보고선 다가와  뽑는  도와주겠다고 했다. 암만 세상 물정 모르는 20 풋내기라도 그게 사기수법인진 너무  알겠다. 게다가 서양인들은 퍼스널 스페이스(Personal Space) 중요하게 생각한다는데, 할아버지 지금  공간을 너무 넘어오셨거든요.  땡스라 말하고 50유로 정도를 간신히 뽑았다. 돈이 나오는 순간, 흰자위로  옆을 빠르게 스캔하는  표적이 되기 쉬운 외국인이 갖춰야  덕목이다.


택시 승강장을 향해 가려는데 또 어디서 나타난 건지 그 할아버지가 왔다. '아니, 진짜 저한테 왜 이러시는 건데요 도대체. 저 돈 진짜 없거든요!!!'라고 말도 못 하지 참. 돈을 인출하는 모든 과정을 어디선가 훔쳐봤을 생각을 하니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지갑이 있는 핸드백을 더 꽉 쥐었다. 할아버지는 내게 뭐가 그리도 궁금한 게 많은지 어디서 왔는지, 공부하러 왔는지 물었다.


자기만 믿고 따라오라고 하더니  택시기사에게 독일어로 말을 한다. 그러곤 대뜸 나에게  손가락을 펼쳐 보였다. 뭐야, 설마 소개 수수료  이런 걸로 10유로 달라는 거야? 진짜 그렇게  생겨선 정말 너무하네. 울컥했다. 택시기사가 짐을 실어줄 테니 타라고 했다. 할아버지를 쳐다보니  손가락은 이내 접은 상태로 어서 가라는 손짓을 했다. 알고 보니 외국인인 내가 택시요금 덤탱이를 맞을까  10 유로면 충분히 간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그렇게  손가락을 계속 보여줬던 거였다. 자세히  알아들었지만 택시기사에게도  학생에게 10유로 이상 받지 말라고 독일어로 말했던  같다.


정말 10유로 정도로 택시 요금이 나왔고,  택시기사는 팁을 요구하기는커녕 8유로만 받겠다고 했다. 내가 학생이고 독일에  첫날이니 앞으로 행복하게 지냈으면 좋겠다고 돈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이때까지 너덜너덜 상처  마음이  녹듯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최악의 하루가  뻔했지만,  마음씨 따뜻한 독일인들 덕분에 평생 잊지 못할 하루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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