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ttagirl Jan 13. 2019

골프의 신이 주무시는 날

골프의 신이 주무시는 날골프의 신이 주무시는 날


특정한 운동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경기에서의 루틴한 의식을 만드는 것도, 실력을 더욱 향상시키기 위해 루틴한 연습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무엇보다 그런 루틴들이 중요한 진짜 이유는 루틴을 유지해야 재미를 제대로 느낄 수 때문입니다.


4년 전 미국에 살 때의 일입니다. 저희 집 10분 거리에는 잭 니클라우스가 설계했다는 베어스 베스트 Bear's Best라는 골프클럽이 있었습니다. 잭 니클라우스는 수백 개의 골프코스 중에서 최고의 홀들을 18개 뽑아 코스를 하나 구성하고 이름을 베어스 베스트라고 지었다고 하죠. 쇼핑할 권리 외에는 별다른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던 F2 신분으로 미국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베어스 베스트의 골프 레인지에 회원권을 끊어 방앗간 참새마냥 심심치 않게 들러 연습하곤 했습니다. 이런 천혜의 환경이 바로 집 앞에 펼쳐진 것을 감사해하면서 말이죠.


그런데 그런 감동도, 감사도, 연습도 하루 이틀이지, 삼사십 달러면 꽤 좋은 골프클럽에서 라운딩을 할 수 있는 곳에서 라운딩을 할 수 있는 기회와 시간에 그것을 마다하고 꾸준한 연습을 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골프에 대한 제 사랑이 끓었다 식었다를 반복하는 것이 문제였죠. 골프코스에 사는 신神은 얼마나 공정하신지, 제 점수의 앞자리는 쉬 바뀔 줄을 몰랐습니다. 롱게임에서 점수를 딴 날에는 숏게임에서 점수를 잃고, 숏게임에서 점수를 딴 날에는 롱게임에서 점수를 다 까먹으면서, 혹시나 싶은 날에도 '라이프 베스트'라 할만한 스코어는 요원했고, 쉬 오지 않는 라이프 베스트를 기다리는 사이 저는 서서히 골프에 대한 흥미를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랜만에 친구들과 라운딩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골프의 신이 낮잠이라도 주무시고 계셨던 걸까요? 평소 엉망이었던 제 어프로치 샷이 기가 막히게 거리를 맞추고 있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제일 자신이 없는 퍼터도 롱퍼트까지 척척 성공시키고 있었습니다. 앞자리에 8자라도 보는 걸까 하는 기대가 그리 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롱게임. 한동안 연습을 안 한 탓에 아이언 샷과 드라이버 샷이 가관이었습니다. 연습을 꾸준히 했을 때에는 아무리 안 맞아도 이런 적은 없는데 말이죠. 정말 모처럼 만에, 아니 머리를 올린 이후 처음으로 맞이한 천제일우의 기회를 저는 이렇게 속절없이 떠나보내고 말았습니다.


골프는 불확실성이 높은 게임 중 하나라고 합니다. 그래서인가 세계 메이저 대회에 우승한 선수가 그다음 달 또 다른 대회에서는 예선 탈락을 하는 믿기지 않는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날씨, 코스, 동행자에서부터 시작해 컨디션에 이르기까지 게임의 성적과 내용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골프에는 아주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서도 어디까지를 불확실성의 영토로 남겨두느냐는 문제는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프리 샷 루틴을 한다거나, 루틴하게 연습영역에 머무르는 습관들을 갖는 것은 불확실성이 가득한 속에서 확실성의 영토를 조금이라도 더 확장해 가려는 아주 작은 노력의 일환일 것입니다.


이왕이면 더 많은 부분을 확실성 안에 두는 것, 가능한 한 많은 부분을 잘 제어해 상수로 두면서 그날 그 코스 그 동반자들과 그 상황에서의 변수를 자유롭게 즐기는 것이 진짜 골프의 재미라는 것을 그날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연습을 안 한 저에게는 모든 것이 불확실성이었고, 모든 것이 변수였고, 그것은 정말 카이오스 그 자체였으니까요.



이전 13화 학습영역과 행동영역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