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시를 돌리며
얼마 전 푸름이가 그릇을 선물했다. 사실, 얼마 전이라고 하기에는 5개월이나 지났다. 선물 받은 그릇은 그동안 자신의 용도를 뛰어넘어 국그릇, 비빔밥 그릇, 라면 그릇, 덮밥 그릇, 요플레 그릇, 볶음밥 그릇에 쓰이며 모든 식사 그릇으로 전락했다. 반면 그릇을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푸름이에게 고맙다고 말한 순간이 너무 짧고 간단하게 느껴졌다. 글로 쓰면 아쉬움 없이 고마울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밥을 먹으며 느꼈던 고마움들을 모아 글로 써보기로 했다. 쉽게 말하자면 반년 사용 리뷰다.
직장동료로 처음 만난 푸름이는 원래는 대학 동기였다. 직장에서 같은 위치와 상황에 놓인 또래들과 친해지게 되었는데 그중 푸름이는 가장 경력이 많았다. 일이 몰아치면 헐레벌떡 동공 지진으로 일하는 나와 달리, 그는 업무가 몰려도 하나씩 순차적으로 정리해나가고 쉽게 조급해지지 않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 모습이 경력에서 나오는 바이브인가 싶었지만, 아직도 자주 평정심을 잃는 나를 생각해보면 경력 덕만은 아닌 것 같다.
그러던 푸름이가 어느 날 퇴사 소식을 전해왔다. 그간 고난의 시간을 보내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던 그가 퇴사를 결정한 건 중심을 잃어서라기보단 중심을 지키기 위한 것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푸름이는 퇴사 이후 막연한 쉼에 유일한 규칙을 정하듯 도예공방을 다녔는데, 도예를 배우며 블로그에 이런 문장을 써냈다.
"나를 알게 되었다는 건 내 중심을 알게 되었다는 말과 같아. (...) 도자기에서는 중심이 참 중요하거든? 나는 물레 위에서 흙의 중심을 잡으려고 하다가 내 중심을 알아챘어. "
이 글에 감동한 나머지 나도 따라서 물레를 돌리고 싶었지만, 아쉬운 대로 도예를 하는 기분으로 그릇을 돌려가며 설거지를 했다. 볼 때는 몰랐지만 그릇은 꽤 울퉁불퉁했다. 이것이 푸름이의 도예 실력일까? 그렇다면 더 실력이 늘지 않아도 좋겠다. 푸름이가 중심을 찾아가는 과정이 울퉁불퉁한 모양으로 녹아든 것 같다. 앞으로는 이 소중한 그릇에 요플레만은 먹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중심을 잃는다는 건 나를 잃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는 반복적인 일상에서 루틴을 잃어버리거나, 간절히 소망한 것이 좌절되었거나, 인간관계에서 마음을 줘야겠다고 마음먹는 순간 종종 나를 잃었던 것 같다.
중심을 잃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아마 평생 독거노인으로 살다 죽거나 아무런 이벤트가 없는 무인도에 살 아야 할 것이다.
인간관계에서 만큼은 자주 중심을 잃을 줄 아는 사람이 나는 좋다. 상대방에게 자신을 맞추는 사람은 본인을 잃을 줄 아는 여유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중심을 마음껏 잃는 사람이 되고 싶다.
아무리 일상에서 중심을 잃지 않겠다고 두 다리에 힘을 바짝 주어도 속수무책으로 흔들리는 인생은 우리의 마음대로 되지 않고, 중심을 잃는 순간에 손 쓸 수 있는 건 많지 않다. 그래서 중심을 잃는 순간보다 중심을 찾아가는 순간이 중요하다. 푸름이가 흙의 중심을 잡으며 본인의 중심을 찾으려 했던 것처럼.
내 중심을 찾아 주는 건 무엇일지 생각해봤다. 아무래도 글을 쓰는 것이다. 푸름이의 중심을 찾게 해 준 그릇을 받은 만큼, 내 중심을 찾게 해 준 글을 푸름이에게 선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