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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정 Nov 14. 2023

작지만 달콤한 쉼표, 믹스커피


어릴 적 무척 맛보고 싶었지만 부모님의 만류로 함부로 맛볼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바로 커피다.
성장기에 커피를 마시면 머리가 나빠진다며 어른이 되면 마시라고 했다.
난 머리가 좋은 편은 아니었기에 혹시라도 머리가 나빠질까 봐 엄마 말대로 잘 참았다.
하지만 식사 후 부모님의 커피잔으로 매번 내 시선이 꽂혔다.

 


요즘은 흔히들 집에서도 커피를 내려마시고 아메리카노를 타 마시고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부모님, 어르신들은

식후 믹스커피를 드시는 게 자연스러운 풍경이었다.
믹스커피 혹은 커피, 프림, 설탕 2:2:2 황금비율로 제조해 드시기도 했다.
엄마가 커피, 프림, 설탕을 티스푼으로 떠서 커피잔에 넣고 팔팔 끓은 물을 부으면 3가지가 한데 섞여 서서히 밀키한 갈색으로 변하며 달콤쌉싸름한 향기가 퍼져 가는 것이 좋았다.



막 물을 부은 커피 위를 빙그르르 맴도는, 그때마다

다른 무늬의 마블링은 커피를 더욱 맛깔스럽게 보이게 했다.  
이 마블링과 향에 홀려 가까이서 향만 맡겠다며 커피잔에 코를 들이밀면 엄마는 정말 향만 맡게 해 주고 냉큼 커피잔을 뺏곤 했다.
어쩔 땐 이 맛있어 보이는 걸 나눠주기 싫어서 못 먹게 하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비로소 성인이 되었을 때 가장 먼저 시도한 것은 직접 믹스커피를 타마시는 것이었다.
소소하지만 달콤한, 별것 아니지만 별것이었다.
경건하게 커피잔과 컵 받침을 꺼내고 주전자에 물을 담아 끓이고, 그동안 어깨너머로 보아 온 대로
2:2:2 황금비율로 커피, 프림, 설탕을 떠서 담았다.
주전자의 물이 끓어오르자 설레기 시작했고 커피잔에 물을 붓자 그동안 나를 유혹했던 달콤쌉싸름한 그 향기와 온기가 퍼져 나갔다. 공간이 왠지 따스해지는 기분이었다.



이내 커피잔 속 커피는 소용돌이치며 마블링을 만들어냈다.
한동안 커피를 젓지 않고 가만히 마블링을 들여다보았다.
젓고 난 후의 커피보다 커피알갱이가 녹으며 만든 진한 갈색 선과 프림이 녹으며 만든 하얀 선의 경계,
또 그 두 선이 혼합되며 만든 연한 갈색선의 조합이 무척이나 맛있어 보였던 생각이 난다.
마침내 한 모금을 마시자 달콤쌉싸름한 맛과 향기, 온기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동안 맡아왔던 향보다, 내 예상보다 훨씬 맛있었다.
그 달콤함과 따스함은 마실수록 온몸에 퍼져서 나도 이제 어른이 되었고 언제든 이 작지만 달콤한 쉼표를 꺼내 맛볼 수 있다는 뿌듯함이 일었다.




이후 주말마다 집에서 엄마와 커피타임을 즐겼다.
더 맛있는 커피를 먹겠다고 믹스커피도 종류별로 마셔보고, 황금비율보다 더 맛있는 비율을 시도해 보다가 커피, 프림, 설탕을 2:2.5:2.5로 탔을 때 가장 맛있다는 것도 알게 됐었다.
(부모님이 평생 마셔본 커피 중 가장 맛있다며 식후 커피 제조를 전담으로 시키셨던 기억이 난다. )
대학생 때는 아르바이트를 해도 용돈이 넉넉지는 않았기에 카페 커피보다 믹스커피를 더 선호했었고
막내작가 때도 매일 커피를 사 마시는 건 부담돼서 종종 하루 두어 잔의 믹스커피로 피곤한 몸을 일깨우고 밤샘을 함께 했었다.
가장 쉽고 저렴하게 당 충전을 하고 졸음을 쫓을 수 있는 한 잔의 작은 쉼표였다.  



요즘도 주말에 하루 정도는 엄마와 좋아하는 브랜드의 믹스커피를 마신다.   

예쁜 커피잔에 따끈한 커피를 담아 마시며 음악을 틀고 책을 읽으면 심신이 이완되는 걸 느낀다.

이번 주말에도 책, 음악과 더불어 예쁜 커피잔에 담긴

한 잔의 쉼표를 마시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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