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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le Feb 23. 2023

아름다움은 닮아간다

St Joseph Vaz Church, Palliyawatte

긴 우기와 미세먼지로 내내 무채색이던 랑카 하늘이 반짝 파란 웃음을 찾았다. 여유로운 주말 아침 햇빛이 내려앉은 길을 조용히 산책하다 평소 걷던 길로는 뭔가 채워지지 않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제 스리랑카서의 시간도 많치 않으니 혼자지만 교외에 잠깐 다녀올 만한 곳이 어디 없을까? 익숙하지만 아직 방문해 보지 않아 궁금하고 거리가 멀지 않아 부담스럽지 않게 다녀올 수 있는 곳 말이다.


와딸라는 수도인 콜롬보에서 10KM 정도 떨어진 섬의 북쪽과 동쪽을 잇는 관문 같은 곳이다. 매번 스쳐 지나가지만 매 여정의 시작과 끝을 함께한다. 여행의 출발엔 차창밖으로 펼쳐지는 짙은 불교 색채가 서서히 옅어져간다 싶으면 와딸라 부근이구나 짐작할 수 있다. (부처님 상이 점점 예수님상으로 변해간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는 길엔 이곳에서 그림자처럼 가까워지는 로터스 타워와 눈에 익은 건물들이 우리를 반겨준다.


차로 30분 정도 걸리니 조용하고 한적한 바다 근처이면서 동네 분위기를 진하게 찾을 수 있는 곳을 검색한다. 주일이니 일단 미사도 볼 생각으로 바닷가 성당 하나를 찍고 택시를 잡아탔다. 큰 대로변을 지나 일 차선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한참을 달린다. 처음엔 너무 외딴곳으로 들어가 당황스러울 뻔했는데 다행히도 기사분이 신자분이라 가는 곳마다 근처 성당 포인트를 짚어 주시며 안전하게 인도해 주셨다.


아지랑이 피어나는 봄의 정원


그렇게 얼렁뚱땅 도착한 목적지 St Joseph Vaz Church.

차에서 내리자마자 입구도 없이 길 위에 그야말로 덩그러니 놓여있는 외딴 성당을 마주한다. 내려 쬐는 정오의 햇살이 반사되어 순백의 자태가 투명하게도 빛난다. 성당 앞마당으로 놓인 작은 뜨락을 채운 하얀 십자가, 어느 하나 튀지 않은 작은 들꽃까지 모든 것이 자기 자리에 있는 것처럼 조화롭고 평화롭다.

시선을 사로잡는 외부에 비해 내부는 크지 않은 경당으로 꾸며져 있다. 신기한 건 성당이 일자형으로 평행하지 않고 성당 입구에서 들어설 때 제대의 위치가 45도 정도 꺾여있다는 점이다. 밖에서 성당 벽면이 잘 보이게 하기 위해서 내부 구조를 변주한 것 같은데 입구에서 그냥 제대를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빼꼼히 고개를 내밀어 깊이 그분을 향해 찾아 들어가는 느낌이 더 좋았다.

경당 내부 규모는 작지만 대신 구조상 남는 공간을 활용하여 이 공간을 수호하는 성인을 더 정성 들여 소개하고 있다. 여느 스리랑카의 성당처럼 벽마다 많은 성상, 성물이 벽을 가득 채우지 않았지만 단순함의 미학이랄까? 모든 이야기를 덜어내고 가장 있어야 할 것만 갖춘 이 공간의 정갈함이 어쩌면 Joseph Vaz 성인과 꼭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실론의 사도가 남긴 발자국


스리랑카의 첫 번째 그리고 유일한 성인인 요셉 바즈는 네덜란드 박해시절, '가톨릭 금지법'으로 모든 사제가 추방된 상태에서 몰래 들어와 전국을 돌며 활동한 인도 고아(Goa) 출신 오라토리오회 사제이자 선교사다. 신앙의 맥이 끊겨버린 이 섬에 믿음의 숨을 불어넣고 단순하고 소박하게 살면서도 빈민구제와 양대 종족인 싱할라족과 타밀족의 언어를 동시에 배워 종족 간 화합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셨다.

요셉 바즈 성인은 1995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으로부터 시복을, 2015년 프란치스코 교황님으로 부터 시성 된 스리랑카의 사도로 이 공간은 그가 성인품을 받은 것을 기념으로 건립되었다. 그래도 최초의 성인품에 대한 기념 공간인데 화려함을 좋아하는 랑카의 교회 특성상 이토록 색채와 장식을 절제한 이유가 궁금했었다. 하지만 가난한 이를 위해 가장 낮은 곳에서 일하며 신앙 안에 평화로운 공존을 만들어갔던 성인의 발자국을 따라 걷다 보니 저절로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진다.

성당 마당에 십자가 뒷면에는 " This Church was build and donated in memory of Mr& Mrs. K.B.M Perera"로 이 공간을 기증하고 지은 사람의 이름이 남아있었다. 남아있는 건물을 최대한 성당으로 개조하여 만들다 보니 그동안 보지 못한 구조가 만들어졌구나 하고 마음속에 남아있는 작은 수수께끼를 풀 수 있었다. 이 땅에 가장 피폐한 시대 사람들의 마음에 신앙을 되돌린 사제가 자신의 터전을 봉헌한 사람들 속에 아직 살아 계시는구나. 청빈한 사제가 서계신 듯한 제대의 구석구석을 마음에 담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아름다움은 닮아있다


이 공간을 좀 더 일찍 알았으면 주일에 자주 찾았을 것 같다. 작고 아담하지만 아늑함과 평안함이 있는 이 공간은 개인적으로 시간이 나면 자주 찾는 가회동 성당과 어쩐지 결이 닮아있다. 한국에 있을 땐 주말이면 혼자 아침부터 부암동 미술관에 갔다가, 서촌으로 내려와 작은 책방을 한 바퀴 돌고 북촌으로 넘어가 미사를 드리는 일정을 소화했다. 특히, 미사 드리기 전 바쁘게 돌아다녔던 다리를 뻗고 은선재 한옥 마루에 앉아 멀리 내려다보는 하늘이 참 좋았다. 편백 향을 실은 바람 한 점이 불어주면 왠지 무언가로 가득 찬 느낌. 지금 그런 충만함을 느낀다.

그 느낌과 기억과 마음에 남아 먼 타지인 이곳에서 고스란히 전해졌던 걸까? 신기하게도 현재의 북촌은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선교사인 주문모 신부가 첫 미사를 집전한 지역이다. 신부님은 한양에 도착해 머물렀던 계동 최인길 마티아의 집에서 처음으로 한글을 배우고 1796년 첫 예수부활대축일 미사를 드렸다. 그리고 그 터가 지금의 가회동 성당이 되었다고 한다. 척박한 박해의 땅에 스스로 찾아와 기꺼이 자신의 삶을 봉헌했던 두 선교사의 영혼이 깊이 연결되어 닿아 있는 듯하다.  


가회동 성당이 지어졌던 건 자신의 터전을 온전히 봉헌한 전길현 마리아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광복 이후 명동성당의 공소에서 본당으로 설립인가를 받았지만 한국전쟁으로 수포로 돌아가고, 전쟁 이후 전 마리아는 1949년부터 이웃에 한옥을 매입하고 자신이 살던 부지를 터를 온전히 증여하여 첫 본당 부지가 확보된다. 멀리서 불어온 민들레 홀씨 같은 신앙이 뿌려지고, 상처를 보듬으며 자라나고, 맺은 열매를 모두 그 자리에 내려놓는 과정까지 어쩌면 이렇게 뜨겁게 닮아 있는지. 우연처럼 이 아름다운 두 공간에 서서 가슴 벅찬 울림을 느낄 수 있음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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