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옳거니.’
곧 미닫이문을 열고 손님이 들어온다. 오늘의 첫 손님이다.
“안녕하셔요.” 수줍게 웃으며 가게 안으로 들어선 사람은 김향화였다. 기생이면서 독립운동가인 그녀는 항상 곱단 하게 한복을 차려입고 분향기를 풍겼다.
“어서 오세요.” 나는 불필요한 말 없이 짧은 답변으로 응대했다.
“곧 영신 언니가 올 건데, 오늘 안주로 어떤 게 괜찮은가요?”
“빈대떡 어떠세요? 돼지비계가 질이 좋아 기름내서 부쳐내면 아주 고소합니다.”
“네, 그럼 빈대떡에 탁주 두 잔 주셔요.”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다 구석 자리에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나는 녹두를 갈아 넣은 반죽에 파와 돼지고기를 넣고, 뒤집은 솥뚜껑을 달궈서 돼지비계 기름을 먹이고선 녹두전을 지졌다. ‘치-르르’ 빗방울이 떨어지는 듯한 맛있는 소리가 가게 안에 꽉 차게 울려 퍼졌다.
그때였다.
“안녕하세요. 주인장님. 기분에 엄청 오랜만에 뵙는 거 같네요. 그동안 잘 지내셨죠?” 문을 열고 말하는 목소리의 주인은 김향화와 함께 여성 독립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는 임영신이었다. 그녀는 키가 5척 하고도 2치나 되어 웬만한 남자 키와 비슷했고 목소리도 쩌렁쩌렁해서 힘이 넘쳤다.
“언니 여기어요. 잘 지냈죠?”
“그래, 향화야 오랜만이다. 그동안 내가 만주 다녀온다고 한참을 못 봤는데 그새 더 고와졌구나.”
“아유, 아니어요. 언니 어서 여기 앉으셔요.”
“그래, 그래 하하. 일단 한잔하며 얘기를 나누자꾸나.”
나는 그녀들이 앉은 자리에 갓 지진 빈대떡과 탁주 두 잔을 내놨다. 임영신은 자신이 만주에서 있었던 일들을 김향화에게 장황하게 한 시간 가까이 털어놓았다. 김향화는 직업이 직업인지라 경청하면서 손뼉을 치며 웃기도 하고 추임새도 넣어가며 말하는 사람의 기분을 맞췄다.
하지만 간간이 얼굴에 그늘이 졌는데 임영신은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기 바빠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저 언니…. 사실 내가 요즘 고민이 있다우.”
“뭔데? 이 언니한테 말해봐. 내가 다 해결해주마.” 말을 하는 임영신의 얼굴은 이미 취기가 올랐는지 많이 붉어져 있었다. 상대의 시원스러운 대답에도 불구하고 김향화는 뜸을 들이며 무언가를 말할지 말지를 한참 망설였다.
“언니, 아무리 생각해봐도 얘기하는 게 좋겠는데 싫어하실까봐 많이 조심스러워요.” 김향화가 아양을 떨며 본론을 꺼내려고 물꼬를 텄다.
“아 괜찮대도. 내가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도 마당발이지 않니? 어디 내가 나서서 안 되는 게 있겠니?”
“언니 다 듣고서도 꼭 이 마음 변치 않는다고 약조해주셔야 해요.”
“아! 이 계집애 사설이 길다. 언니가 어디 한 입으로 두말하는 거 봤니? 목 빠지겠다. 이년아! 얼른 말해봐” 임영신이 김향화를 다그쳤다.
“언니, 사실은 언니가 만주에 가 있는 동안에 이곳 사정이 많이 달라졌어요. 조선총독부에서는 이제 독립운동가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알 정도로 감시가 심하거든요. 뭐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百戰百勝)이다. 하면서요.”
“그래서?”
“요즘은 독립운동을 해도 적당히 융통성 있게 일본군이랑 외교 관계를 맺은 상태로 움직이는 게 지혜로운 방법이거든요. 정보를 어느 정도 흘리되 다 주지는 않는 거죠. 쉽게 말해서 이중 첩자!”
“야, 그거참 놀랄 노 자다! 적과 동침도 아니고 요즘 경성 물정이 참말로 그렇단 말이냐? 그거야말로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임영신은 눈이 땡그래진 채 술이 살짝 깬 듯 침을 튀기며 흥분해서 말했다.“괜히 쇠고집처럼 굴다가 끌려가서 고문당하고 주검이 되느니 적당히 휘면서 뜻하는 바를 이루어 나가는 게 전략이어요.” 김향화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