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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토끼 Oct 23. 2021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

#4




“규식아 내가 이렇게 급하게 너를 부르게 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내가 어제 향화한테 아주 재밌는 정보를 듣게 됐지 뭐냐.”

“누이, 그게 뭔데?” 이규식은 바로 눈빛을 빛내며 반응했다.

가게를 한창 자주 찾을 때의 그를 기억하는 내 입장에서 그에 대한 평을 하자면 그는 의협심은 뛰어나지만 상당한 호사가(好事家)였다. 


한참 동안 어제 김향화와 임영신이 나눴던 대화 내용을 그대로 전해 들은 이규식은 맨 처음에는 화부터 냈다.

“누이! 제발 남 일에 오지랖 부리지 말라고 내가 몇 번을 말했잖아! 그리고 내가 자리 비운 사이에 요즘 독립운동가들은 별로 도덕의식이나 사명감 없이 조국을 위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구나. 일본놈들이랑 손을 잡다니 이게 무슨 개뼈다귀 같은 소리냐고! 개탄스럽다 정말.”

“아 이 녀석아, 독립운동가들 사이의 일이 어디 남 일이냐? 그리고 누나한테 말하는 꼬락서니 하고는…. 추운 만주벌판을 누비다 온 누이를 따뜻하게 반기지는 못할망정. 쯧! 게다가 태준이도 엮이어서 제일 연장자인 내 입장에선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어.”

“심태준? 그놈은 왜?” 심태준을 언급하자 이규식은 임영신에게 한참 짜증 내던 기세를 살짝 누그러뜨리며 일그러졌던 표정을 바꾸고 흥미를 보였다.

“향화가 태준이가 설득이 안 될 거 같다고 우리끼리 비밀로 하자고 하더라. 이번 임무만 일본군과 타협하고 차후를 도모해보자는 거지. 뭐 결론적으로는 태준이에게 신의를 저버리는 꼴이니 조금 미안하지만 말이야.”


그 말에 이규식은 갑자기 태도를 바꾸며 대화를 이어갔다.

“누이, 내가 순간 욱했는데 이 이야기를 차근히 듣다 보니까 말이야. 전체적으로 나쁘지 않네. 나 사실 태준이 그놈이 펜대 잡고 먹물이라고 매번 잘난 척하는 게 눈엣가시였거든. 게다가 여자들까지 그 녀석 뭐가 좋다고 혹하는 꼴도 보기 싫었고. 그리고 정보만 파는 거지 태준이가 뭐 죽는 것도 아니잖아.”

“아 그렇대도. 나는 향화한테 딱 이 얘기를 듣는 순간! 이 방식이 훨씬 선진적이라는 느낌이 팍 들었다. 잘은 모르긴 해도 돈도 몇 푼 챙겨 주겠지. 돈도 벌고, 일본군과 협력하는 척한 이후에 교란도 하고! 규식아 휠 때는 휠 줄 아는 게 연륜이다.”

“그래. 이번 일을 계기로 태준이 녀석 콧대도 좀 눌러주고, 일본군 뒤통수도 치고! 하하. 맨날 똑똑한 척은 혼자 다 하는데 이번 일을 계기로 그놈도 좀 느끼는 게 있겠지.”

임영신은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이규식의 말을 잘랐다.

“그래도 규식아, 독립운동가들인 우리는 한배에서 나온 형제들이나 진배없으니 투덕거려도 우애 있게 지내야 한다! 내가 그럼 내일 향화한테 기별해서 그쪽 일본 순사랑 자리 만들어보마.”

“아, 그래 알았어.” 이규식은 잔소리는 듣기 싫다는 듯이 볼멘소리로 짧게 대답했다.


이후 몇 잔을 더 기울이고 취기가 오른 이규식은 연신 자신의 연인에 대한 자랑을 임영신에게 늘어놓았다. 둘 다 말수가 많은 편이라 서로 신변잡기의 얘기를 한참 하더니 다른 손님들도 다 귀가한 마감 시간이 되어서야 둘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내가 어제오늘의 일들을 보고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고 말하면 그것은 거짓말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단히 깊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옛말에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없다.’라고 하듯이 독립운동가들도 독립운동가이기 전에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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