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세다, 말세.”
편의점 아저씨가 미선의 옆을 스치며 혼잣말을 뱉고 떠났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얼른 어디에 앉고 싶었다. 현수는 땅만 내려다보며 오른쪽 신발코로 땅을 툭툭 쳤다. 뽀얀 먼지가 일었다.
“얘들아, 일단 어디 가서 이야기 좀 하자.”
미선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평화반점. 허름한 중식당이 눈에 띄었다.
저녁 먹기에는 이른 시간이라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주문을 하기 전 미선은 현수에게 집에 있는 어른들에게 전화하라고 시켰다. 전화 통화를 끝낸 현수는 교실에서의 모습과 달랐다. 영판 겁먹은 아이였다.
"뭘 먹을래?"
"짜장면요."
동규가 즉각 대답했다. 입꼬리가 올라가 눈이 반짝거리는 동규는 현수를 쓱 쳐다보더니 "니도 얼른 시키라."하고 말을 건다. 현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대답이 없었다.
"사장님, 여기 짜장면 두 그릇만 주세요."
미선은 현수에게 다시 묻지 않고 그냥 짜장면 두 그릇을 시켰다. 낡은 TV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가요무대를 보고 계시던 사장님이 TV를 끄더니 "짜장 두 개! 알겠습니다."하고 주방으로 들어가셨다.
식탁 위에 엎어놓은 맥주 컵을 꺼내 물을 따랐다. 아이들 앞에 한 컵씩 부어주고 난 미선은 곧 나머지 컵에 물을 따라 마셨다. 말간 물을 들이키며 이게 시원한 맥주였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현수는 아직도 아래만 보고 있었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부딪힌 얇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 같았다. 갈색빛의 속눈썹을 보니 왠지 마음이 흔들렸다.
"선생님, 그런데요. 아버지한테는 전화하지 마세요. 부탁이에요."
현수의 목에서 오래 삭힌 말이 튀어나왔다. 단단하고 까슬까슬했으나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말이었다.
"아까 고모님과 통화했으니, 고모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불안해하는 현수를 보니 미선은 반대로 차분해졌다. 현수를 몰아세웠던 자신의 실수를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어 보였다. 그런 자신의 모습이 스스로 놀라웠다.
"그런데, 얘 어떡해요. 그 형들이 가만히 안 놔둘 텐데..."
현수가 동규를 가리키며 말을 흐렸다.
"뭐,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건드릴게 뭐 있다고... 혹시나 동규야, 혼자 다니지 말고, 무슨 일 있으면 꼭 선생님이나 어른들에게 말해야 해!"
동규를 보며 미선이 꺼낼 수 있는 말은 그게 전부였다.
짜장면이 나왔다. 미선은 두 아이 앞으로 짜장면을 밀어주었다.
"선생님은예?"
동규가 미선을 쳐다보았다.
"아니, 난 별로. 얼른 먹어."
미선이 대답했다.
동규가 신나게 짜장면을 먹기 시작했다. 먹는 소리마저 요란하던 동규가 얼굴을 들었을 때, 미선과 현수는 웃고 말았다. 현수는 미선의 권유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젓가락을 들었다가 접시를 깨끗이 비웠다. 현수의 입가도 동규못지않았다. 접시를 비운 둘이서 마주 보며 씩 웃었다. 미선도 같이 웃었다.
현수는 동네 형들의 강압에 못 이겨 편의점에서 전자담배를 두 번 훔쳤다고 실토했다. 물건을 찾아달라고 형들이 아저씨의 시선을 돌리면 자기는 슬쩍 담배를 꺼내갔다고 했다. 미선은 현수와 함께 다시 편의점을 찾았다. 5만 원 한 장을 사장님께 드리며 용서를 구했다.
"죄송합니다. 앞으로 안 그러겠습니다."
현수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어렵게 말을 꺼냈다. 편의점 문을 열고 나온 셋은 한참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미선은 아이들을 태워 집 어귀까지 바래다준 후 손을 흔들었다. 두 녀석은 꾸벅 인사를 하고 갔다.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한 거리를 달리며 미선은 오늘 하루가 정말 길구나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