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7. 내일 할 일 : 야반도주
- 이번 경험은 어땠어? 똥맛 된장이었어? 된장맛 똥이었어?
퉁명스레 묻는 그 놈은 바로 기사단장. 하루키의 소설 <기사단장 죽이기>에 나오는 그 자였다.
짧뚱한 몸으로 꽤 편안해 보이는 난간에 걸터앉아 다리를 흔들고 있다.
이마에 주름을 지며 건방진 표정으로 내게 다시 묻는다.
- 그럼 그렇지. 네 양은냄비 같은 성정이 어디 가겠어? 그래도 1년은 꼭 채우긴 하네. 퇴직금 때문인가? ㅋㅋㅋ
그 물음을 듣던 순간 나는 내 표정을 볼 수 없었다.
그때 거울이 있었다면, 금방이라도 토할 것처럼 일그러진 얼굴을 볼 수 있었을 거다.
감정 숨기는 거 참 재능 없어.
- 너도 참 아득바득 어떻게든 살아가긴 하는 걸 보면 참 신기하단 말야.
그런데 있잖아. 다들 결혼하고, 승진하고 열심히 돈 모아서 집 사고, 차 사는데..
너 진짜 괜찮아? 너 내년이면 전세도 끝나고 리스 중인 지금 차도 인수해야 하잖아. 전세 올려달라고 하면 방법이나 있어? 차량 인수 비용이나 좀 모았어? 야 너 서른 중반인데 이제 ㅋㅋㅋ 너 뭐 돼?
좁쌀만 한 게 거 되게 쪼아대네. 꿈이 이렇게 쓰릴 일이야?
나는 신경 끄라는 듯 말했다.
- 지금 상태로는 사는 게 어려우니까 더 나은 방법을 찾아보려고 여기서 나가는 거잖아. 나 자신 있거든. 그니까 좀 조용히 해.
내 말이 끝나자마자 기사단장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떤 부인의 얼굴로 변했다.
이전에 몇 번 마주쳤던 여자다. 매번 웃으며 나에게 잘 부탁한다던 그 부인.
부인은 처음 보는 매서운 눈초리로 나를 쏘아보았다. 그리곤 나직이 말했다.
- 이 눈빛이 어떤 뜻인지 알죠? 실망이에요.
불현듯 잠에서 깨어났다.
이번에도 온몸은 식은땀으로 젖어있다.
몸이 허한가? 매번 찝찝해 살겠네.
비치타월이라도 깔고 자야 하는 건지 원..
# 함께하면 더 좋을 플레이리스트
https://www.youtube.com/watch?v=-AUm4vqTuKM
<연못에 가라앉은 피아노 - Niwamori Piano>
마지막 출장 행사가 후루룩 끝났다. 서울에서도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굳이 또 일기로 남기고 싶지가 않네. 뭐 이젠 재미도 없고 말야.
매출 성적은 그럭저럭. 근데 왜 이렇게 바쁜 거야. 택배가 대략 200박스는 나가야 하는데 3일 동안 이제 반절 나왔네..
말끔히 해결된 기분으로 퇴근하는 건 역시 끝나는 날까지도 무리인가 봐.
원래 출장 행사까지만 일 하고 바로 퇴사하려고 했는데, 행사 택배 발송까지는 도와달라고 사정하여 3월 둘째 주에도 일을 하는 중이다. (사실 뭐 어디 갈 데도 없다.)
그래, 힘들 때 사람 버리는 거 아니라고 그랬어.. 라며 마음 약한 소리로 일주일만 더 참자고 다짐했다.
도자기와의 매끄러운 안녕을 위해 조금 더 굴러간 지 4일이 흘렀다. 손목이 저릿하고 허리가 쑤신다.
내일이면 정말, 정말 도자기 공장을 떠난다.
이번 경험도 배우고 느낀 것은 많으나, 투여한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은 것이 사실이기에
또 언제 발현될지 모를 씨앗으로만 가슴 안에 남게 되겠다.
내가 도자기를 하기엔 너무 쏘다니는 놈이라 안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이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내 기물에 대한 관심이 줄겠지..
그냥 내 굿즈는 디자인만 직접 해서 위탁 생산으로 만들어야 하나.
지금은 잘 모르겠다. 일단 내 소설이나 퇴고하고 생각하자..
'작업장이 어려운 시기에 퇴사하는 것이 푸바오에게도, 작업장 식구들에게도, 또 나에게도 참 미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도 먼 훗날에 좋은 기회로 다시 만나서 요즘은 어떤지, 건강은 괜찮은지 묻고 싶다.
내가 무럭무럭 자라서 혹시 기회가 된다면 어떤 방법으로든 협업 제안도 해보고 싶다.
우리 브랜드, 아니 내가 몸 담았던 이 브랜드는 분명 더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개풀.
틈틈이 써놨던 일기 글감에 적힌 문구다.
저 땐 저렇게 아름다운 이별을 준비하고 싶었나 보다.
아오 근데 요 몇 주간 이런저런 일들로 작업장에 정이란 정은 다 떨어져 버렸다.
사람들 얼굴도 보기 싫고 그릇도 다 깨버리고 싶을 정도로 스트레스가 충만해져 있다.
그 덕에 요즘 자주 찾는 카톡방이 있다. 그 방에서 내 일터 욕을 신나게 하고 있다. 그래서 그 방은 거의 돌멩이의 감정 쓰레기통이 되었다. (글쓰기 대신 분노를 해소할 공간이 생겨서 일기를 열심히 안 쓰는 걸지도 몰라..)
그 카톡방은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있는 방인데, 요즘 너무 내 감정만 앞세워서 그들에게 민폐를 끼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조금 진정하고 더 열심히 글을 써서 부정적인 감정을 해소하는 것이 좋겠다.
그간 내 악한 마음 들어주어서 고개 숙여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고맙습니다 휘경동 친구들. 부디 적게 일하고 많이 버시길..
내일모레부터는 마침 일을 쉬고 있는 피글렛과 함께 퇴사기념 야반도주를 계획하고 있다.
야반도주.
단어 자체가 카타르시스 뿜뿜이다.
'부정적인 얽매임으로부터 능동적으로 벗어나는 것.'으로 풀어쓸 수 있으려나.
내 경우, 떳떳하지 못하게 떠나는 것도 아니고, 야밤에 출발할 것도 아니지만 그냥 지금은 이 단어가 너무 마음에 든다.
도주 후 복귀가 언제일지는 모르겠다. 돈이 없으니 여행이 그리 길지는 않겠지만.
아무런 걱정 없이 온전하게 느리고 서정적으로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려 한다.
이 시기의 그녀와 내가 그런 것처럼.
피글렛에게 내 역마를 함께하길 부탁해도 괜찮은 건지는 모르겠다.
일단 그녀가 말하길 아주 아주 기대 중이라고 한다. 빨리 주말이 왔으면 좋겠다고.
이 녀석, 연애 초 콩깍지가 단단히 박혀버린 게 분명해.
피글렛의 마음이 이러니 성심을 다해 그녀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게 예의!
많이 웃고 오자, 우리.
다음 서른여덟 번째 일기는 어디서 쓰게 될까?
나도 모르겠다.
그래서 너-무 즐겁다.
아무튼 그간 고생 많았다. 돌멩 실장.
이제는 야생으로 가자.
다음 똥은 어떤 맛일런지.. 기대가 되는 구만.
고생 많았습니다.
잘 자요 ~_~
출처
1. 대문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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