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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도이야.
아픈덴 없니? 나는 코가 꽉 막혀서 불편해. 머리도 멍하고.
차라리 일도 못하게 쓰러졌으면 좋겠어... 아냐, 이 말은 취소야. 몸 건강한 게 가장 중요한 건데.
우리 아프지 말자.
요즘 여긴 비가 억수로 쏟아졌다가 해가 튀길 듯이 내리쬐는, 축축하고 무더운 날씨가 반복되고 있어.
일하기 참 그렇고 그런 날이야. 우산을 쓰거나 우비를 입기도 어려워.
객실에 들어갔다 나갔다를 반복해야 하니까. 그래서 요즘은 비에 젖은 머리카락이 마를 새가 없네.
입실 시간이 3시인데, 그전엔 상황을 끝내두어야 하니까 날씨가 도와주지 않는다고 해서 일을 뒤로 미룰 수는 없지.
투숙객들은 현장의 어려움을 생각지도 않을 거고, 생각할 필요도 없는 거니까.
오늘은 다행히 보통 때보다 입실이 적었어. 딱 두 개실. 나름 한숨 돌린 거지.
이제 7월 말, 8월 초 극성수기 기간으로 가고 있어서 평일에도 예약이 꽤 차고 있어.
온라인 홍보를 담당하는 분들의 노력이 컸지.
네이버에서 '00 지역 펜션' 치면 첫 화면에 예약창이 나올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내고 있어.
물론 현장에서도 잘 받쳐주고 있으니까 이런 결과물이 나올 수 있던 거겠지. 근데 난.. 솔직히 두렵고 부담스러워.
빼곡하게 차오르는 예약내역 목록들과 여기저기서 들어오는 부가서비스 이체 알림 들을 보면
'귀한 시간 내서 쉬러 가는데 방 더럽기만 해 봐!', '불만족스럽기만 해 봐!' 따위의
투숙객들이 보내는 경고로 보여.
갑자기 예약율이 늘고 이것저것 부가서비스를 제공하는 덕에 전보다 현장이 바빠졌는데
되려 인력은 떨어져 나가고, 청소 퀄리티는 떨어지고.. 시설 보수는 손도 못 대고..
자연스럽게 개인 시간이 확 줄어드는 탓에 몸과 마음이 자꾸만 무너지고 있어.
여기 주변 사람들에게 요즘 내가 듣는 말이야.
'일을 미루지 못한다. 꼭 해내려는 강박이 있다.'
'너무 혼자 하려고 한다. 업무 분배를 해야 한다.'
'지배인님 너무 힘들어 보여요. 몸부터 챙기세요.'
'일하기 전에 밥부터 먹고 해. 쓰러지면 안 된다 너 같은 애를 어디서 찾니.'
'인력 부족이지.. 일단 다 같이 버텨봐요. 나도 힘들어.'
이런 거 말고 좋은 말들이 분명 있을 텐데, 요즘 내가 어두워져 있는 게 확실해. 부정적인 말들만 머리를 빙빙 도는 걸 보면.
근데 어떻게 해. 내가 안 하면 안 돌아가는데. 일하는 사람들, 투숙객들은 쏟아져 오는데.
오늘 미루면 내일 내가 결국 해야 하는 일인데.
뻔히 객실 들어가면 손님 받을 준비가 덜 되어있는 상황인데.
내가 이상한 건지 사람들이 이상한 건지.. 이렇게 생각하다가 보면 결국 또 자기 비하 아니면 남들 나쁜 사람 만들기로 수렴하게 돼.
일터에서 소통 못하고 어려움 느끼는 거. 참 고쳐지지 않는 내 고질병이야.
오늘 두 시 넘어 입실 준비를 끝내고 점심을 먹으려 밑으로 내려가려는데
전날 숙박했던 사람들이 분리수거장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더라고.
깨진 유리창 효과라고 아니? 사소한 무질서가 사람들 심리에 연계반응을 일으켜서 더 큰 혼란을 불러올 수 있다는 말인데,
아무튼 이대로 두면 안 될 것 같아서 그걸 막 정리하려고 했어.
그때 주인 어머니한테 무전이 오더라구. 빨리 밥 먹으러 내려오라고. 두시쯤 밥을 먹기로 했거든.
하.. 이걸 어떻게 두고 가. 바로 옆 객실이 잠시 후에 입실인데.
일단 무시하고 계속 치우는데 전화가 오더라구.
비는 쏟아지지, 손은 쓰레기와 음식물로 범벅이지.. 전화도 그냥 무시할 수밖에 없었어.
이윽고 무전으로 날카로운 소리가 들리더라구.
그 무전기는 청소하는 사람들도 가지고 있고 다른 직원도 들고 있는데, 얼마나 당황스럽고 성이 나던지...
주인 어머님 딴에는 내가 걱정되니까 그러시는 거지만 순간적으로 끈이 팍 끊어지더라고.
내가 누구 잘 되라고 비 쫄딱 맞으면서 이러고 있는 건데 하면서.. 그 밥 먹으면 참 소화 잘 되겠다 하면서.. ㅎㅎ
그렇게 얼굴이 벌게져서는 쓰레기를 차에 한가득 싣고 위에서 내려왔어. 펜션 아래쪽에 있는 메인 분리수거장으로.
차를 세우고 쓰레기들을 막 내리는데 비에 젖은 박스가 찢어지면서 안에 있던 소주병들이 떨어져 깨졌어. 음식물 봉투는 찢어져서 국물이 줄줄 세고, 스티로폼 박스는 이래저래 나부끼고..
아....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 그간 쌓인 스트레스가 범람해서 여기 더 있으면 미쳐버릴 것 같더라고.
뭐에 씐 사람인 양 내 짐이 있는 관리동으로 가서 젖은 옷을 벗어던지고 아무 옷이나 갈아입었어. 그 정신에 도이 너에게 전할 편지를 쓰려고 노트북이랑 충전기도 챙기고.
차를 타고 밖으로 나가면서 어머님과 고용주 대표님에게 전화를 했어. 오늘 입실 준비 끝났고,, 미칠 거 같아서 잠깐 머리 좀 식히고 오겠다고.
다들 처음엔 벙 쪘는지 말이 없다가 그러라고 하더라고. 지금쯤 내가 그만둔다고 하지 않을까 걱정들 하시겠다. 앞으로 더 바쁠 예정인데.
신기하게도 내게 비상 상황이 터졌다는 게 어떤 방식으로든 지인에게 알림이 울리나 봐.
무표정으로 힘 없이 달리는 차 안에서 여러 사람에게 전화를 받았어.
잘 지내는지, 요즘 무슨 일 하는지, 일하는 펜션 예약 할 수 있는지.
이제 기술 하나 잘 배워서 먹고살아야 한다느니. 결혼도 해야 하지 않느냐느니.
씁쓸하기도 하고 위로받기도 하면서, 사람 사는 건 결국 다 인간관계구나 싶더라.
그렇게 펜션으로 웬만한 짐을 다 빼서 이제는 텅 비어있는 아파트로 돌아왔어.
문 앞에는 미리 시켜놓은 햄버거가 도착해 있더라.
찝찝함에 옷을 벗어던지고 바로 그것들부터 입에 욱여넣었어. 너무 배고팠거든.
다 먹고 찾아온 식곤증에 앉아서 잠시 졸다가 일단 깨끗이 샤워를 했어.
이 공간이 유일한 안식처라서 이 방을 뺄 수가 없네.
펜션에서는 들리고 보이는 모든 게 스트레스였는데.
멍하니 아무도 없이.. 에어컨 바람 쐬면서.. 좋다.
이렇게 아무 방해 없이 네게 편지(를 가장한 눈물의 아우성)도 쓸 수 있고 말이야.
펜션에서 일하면서 얻으려고 기대했던 건 말야.
외부 자극에 격리된 채로 차분하게 글을 쓰면서 내 개인 작업을 할 수 있는
약간의 시간과 소박한 공간이었거든?
기대보다는 펜션 상주직이라는 게 그리 녹록지는 않네. 내 욕심이었던 건지, 내가 좀 더 독해져야 하는 건지..
요즘은 평일 주말할 것 없이 관리동에 돌아와 씻고 나서
내일 몇 사람을 어떻게 쓰고 어떻게 움직 일지를 정리하면 밤 9시, 10시가 돼.
그걸 끝내고 나면 이젠 뭘 하기가 싫어져. 그래서 성인이 되고 직장에 다니는 동안 늘 내가 그래왔던 것처럼
고단했던 하루를 보상받기 위해 안 좋은 음식들에 술을 마신다던지 하는 거지. 당연히 그렇게 하루가 술, 담배로 마무리되고.. 개인 작업 속도는 더욱 더뎌지고.
사실 요즘 매일 같이 술을 마셨어. 그러고 보면 널 술 못 마시는 사람으로 그려내고 싶지 않은 이유가 이거였나 봐. 술을 좋아하면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게 너무나 더뎌지거든. 네가 너무 천천히 성장하면 사람들이 우리 이야기를 보고 하품을 하게 될 거야. ㅎㅎㅎ.....
... 나은 사람이 되는 거라는 건 대체 뭘까. ('당신은 지금 그 모습으로도 충분히 멋져요.'라는 말은 아무런 도움이 안돼.)
나는 왜 더 나은 사람이 되려는 걸까. 더 나은 사람이란 건 어떤 사람인 걸까.....
그냥 웬 종일 어디든 걸어 다니며 적당한 공간에 앉아 글이나 쓰고, 맛있는 거나 먹고, 사람들 만나고.. 그렇게 살고 싶다.
그런 삶을 향해서 한 발 한 발 걸어가다 보면 언젠간 나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겠지?
뭐가 됐든 내가 행복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어.
일단 한숨 자고..
가벼운 머리로 다시 펜션으로 들어가야지.
아무 말 없이 잠수하면 삼류 인생이고
나 없이 잘 돌아가나 보자 저주하면 이류 인생이고
다 같이 어려운 상황을 개선해서 다들 웃을 수 있게 만드는 게 일류 인생이니까.
오늘도 차분하게 들어줘서 고마워 도이야.
네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나도 조금 더 힘을 내볼게. 건강을 위해 술, 담배도 확 줄일게.
다음에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