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사:만신 프로젝트 003]
지난 5월~6월 두 달 간 집콕 생활을 하던 동안 관련 자료들을 리서치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 기간 중에 가장 많이 생각이 났던 건 내가 아는 기억에서의 지금은 돌아가신 내 할아버지와 할머니였다. 내가 태어난 이래로 성인이 될 때까지 맞벌이 부모님 대신 함께 오랜 기간을 살았고, 20대 때 할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시고 그 후 10년 뒤 할머니께서 돌아가셨었었으니 노인분들의 생활양식 및 습관에는 익숙해졌다고 하나. 물론 내가 아는 선에서만.
할아버지와 관련된 기억, 늘 무뚝뚝하시고 대화가 없으셨고 파고다 공원에 마실을 나가셨다가 종묘와 광장시장 주변을 구경하시는 것이 소일거리셨다. 그리고 지독한 구두쇠 셔서 하루 용돈 200원 이상은 아무리 준비물이 필요하다 해도 그 이상은 주지 않으셨고 보일러도 내가 중학교에 올라간 뒤로 썼었던 기억이 난다. 이제는 희미한 기억이지만 아주 어린 시절에는 연탄을 뗐었으니까. 난방을 트는 것도 영하 10도 이하로 떨어져야 겨우 틀었던 기억이 난다. 너무 추웠던 나는 말없이 내 얼음장 같은 손을 할아버지 목덜미에 갖다 댔었다. 한 달 내내 그렇게 하고 나니 그제야 편하게 난방을 틀었던 기억이 난다. 할아버지에게 받았던 유일한 선물은 9살 때쯤 받았던 어린이 그림책 1권. 임금님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소소한 재미가 있고 엄청나게 감동적인 내용은 아니었지만 몇 년 전 이사하기 전까지 가끔 책장에서 그 책을 꺼내 읽곤 했었다.
그리고 내가 12살 때쯤 바느질을 하다 넘어졌던 적이 있었는데 하필 이불용 바늘이 부러지면서 왼쪽 다리에 박혔던 적이 있어 할아버지가 응급실로 급하게 나를 데리고 갔었던 적이 있다. 그 당시 의사를 통해 들었던 기억은 바늘이 혈관을 타고 올라가면 심장까지 도달할 수 있어 위급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수술까진 아니고 2시간가량 바늘 찾기를 통해 무사히 처치를 받고 돌아왔던 기억. 내가 할아버지를 기억하는 모습은 그렇다. 구두쇠, 무뚝뚝함, 서투름. 내성적인.
할머니는 할아버지와는 반대로 서글서글하고 늘 노래를 즐겨 부르셨다. 덕분에 어릴 때의 우리 집 일요일 점심 TV 채널은 전국 노래자랑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아침마다 나를 데리고 동네 뒷산을 한 시간씩 걸으셨고 노인대학과 성당을 다니시던 부지런하신 분이시기도 했다. 할머니의 가장 빛나던 순간은 1930년대 공부를 잘하셔서 고등학교도 다니시고, 할머니의 형제분들도 모두 공부를 잘했고 수석으로 학교를 졸업하셨다는 그 시절 이야기를 가장 많이 들었었다. 일본어도 기본 회화는 기억하고 계셨는데 정작 일본에 가신 적은 없으셨고, 6.25와 근현대사를 살아오셨던 분이셨다. 나중에야 알게 됐지만 할머니의 건강상의 문제로 청량리에서 공기 좋은 지금의 동네로 이사를 오셔서 건강을 챙겨 오셨다. 내 기억속의 할머니는 어떨때는 소녀같고, 어떨때는 깍쟁이같으면서도 인자하셨던 할머니. 혼잡한 시내를 벗어나 산과 자연이 펼쳐진 한적한 오래된 집에서 지내오셨던 그분들의 여생과 내 삶의 초기 부분은 맞닿아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대화도 없고, 서로 간에 관심도 없고, 어쩌면 식구 중 누군가 외박을 해도 모를 수도 있겠다 싶은 적막할 수도 있었던 그 집에서 감정표현에 서투른 사람들끼리 나름대로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지 않았나 싶다. 그 분들의 반의 반도 살지 않은 내가, 나의 부모님과 두 조부모님과 조상들의 역사를 조사하고 고찰해보고, 그런 것들이 쌓여서 나의 한부분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되짚는다. 그 시절을 살아보지 못한 나는 구술과 기억에 의한 재구성을 해보면서 조금이나마 그분들에겐 그게 최대한의 애정이었음을, 하나의 삶의 방식임을 이해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내 기억에서의 할아버지와 할머니에 대한 추억은 긴 기간 동안만큼 많았을지는 몰라도, 나이가 들어갈수록 떠오르던 건 소소하고 따뜻했던 기억들 뿐. 십 년 뒤, 이십 년 뒤에도 떠오를 그 시절 두 분의 모습은 그대로 머물러 있다. 그리고 또 다른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기 위해 집을 나선다.
ⓒ 美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