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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을 발견하는 순간

의문으로 시작된 한 모금

by 글은

연휴가 길었던 어느 오전.


탁자 위에 커피 한 잔을 내려두고 소파에 몸을 기댄다. 한숨을 크게 내쉬며 적당히 식은 커피를 천천히 한 모금 입에 가져간다. 은은하게 퍼지는 베리류의 산미가 혀끝을 건드린다. 그런데 산미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예상과는 조금 낯설었다.


단맛이 느껴져야할 자리에 마치 무중력 상태에 떠다니는 물방울처럼 스스로 엉켜 하나의 구체의 느낌이 들었다. 그 구체는 기름에 둘러싸인 듯하고, 혀 어딘가에 자리 잡아 약간 느끼하면서도 부드럽다. 뭐랄까, 뭉텅하다는 표현이 가장 가까울 것 같다. 나는 머릿속이 복잡해 졌다.


‘이 뭉텅한 맛은 뭘까? 혹시 내가 커피를 잘못 내린 걸까?’ 갑자기 의문이 들어 테이스팅 노트를 찾아봤다.



Raspberry Jam, Cream, Chocolate.

라즈베리 잼, 크림, 초콜릿.



순간 머릿속이 환해졌다. 내가 느낀 그 낯선 뭉텅함은 바로 크림의 질감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맛과 향을 구분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묘한 희열감이 들었다. 테이스팅 노트를 보지 않았더라면 ‘뭉텅하다’는 애매한 감각으로만 남았을 텐데, 정확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새로웠다. 마치 퍼즐의 한 조각을 맞춘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직 커피 맛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적어도 조금씩 분리해서 느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이 작은 발견에 용기가 생겨, 이번엔 아이스 커피로 마셔보기로 했다. 차갑게 식은 커피는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산미는 아이스 커피에서 훨씬 더 선명해졌다. 라즈베리 잼처럼 상쾌한 산미가 입안을 꽉 채웠고, 차가운 온도가 그 산미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하지만 크림의 부드러움과 초콜릿의 무게감은 한발 물러선 채 산미를 더욱 돋보이게 해주고있었다.


테이스팅 노트를 찾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정보를 확인하는 일이 아니다. 느낀 감각에 이름을 붙이는 과정이다. 그 이름을 통해 맛을 기억하고, 다시 떠올릴 수 있다.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느낀 뭉텅한 크림의 부드러움과 아이스 커피의 생생한 산미. 이런 발견이야말로 커피가 주는 진짜 재미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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