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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에 비친 원두의 얼굴

로스팅에 대한 궁금증

by 글은

커피의 맛은 불 위에서 다시 태어난다.

같은 원두라도 로스팅이라는 과정을 지나며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원두의 본래 개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불의 온도는 어디쯤일까. 혹은 개성을 따르지않고 로스팅에 따라서 전혀 다른 개성을 발현 시킬수있을까?


땅에서 비롯된 성격

에티오피아의 산지는 꽃향과 과일향을 품은 원두를 내놓는다. 콜롬비아의 고도는 부드러운 산미와 고소함을 담아낸다. 같은 토양에서도 농장과 시기에 따라 결이 달라지고, 같은 품종이라도 다른 불길 속에서 전혀 다른 목소리를 낸다. 결국 출신지는 원두의 가능성을 열어주지만, 그것이 어떤 음색으로 울릴지는 아직 정해져 있지 않다.


손길이 남긴 흔적

워시드는 맑은 빛처럼 깔끔한 맛을, 내추럴은 햇볕에 익은 과일처럼 농익은 향을 남긴다. 허니 방식은 그 사이 어딘가에서 은은한 단맛을 감돌게 한다. 원두는 이렇게 가공의 손길을 거치며, 하나의 잠재된 선율을 갖게 된다.


불이 결정하는 표정

라이트 로스팅은 원두가 지닌 자연스러운 목소리를 가장 투명하게 드러낸다. 섬세한 산미, 꽃향, 과일향이 살아나고, 입 안은 한 모금의 노래처럼 맑아진다.
미디엄 로스팅은 산미와 단맛, 고소함을 부드럽게 묶어낸다. 원두의 성격을 존중하면서도, 조화롭고 따뜻한 균형을 이룬다.


다크 로스팅은 불길이 남긴 농밀한 흔적을 품는다. 초콜릿과 스모키함, 묵직한 바디감이 덮어 씌워지며, 원두의 본래 성격은 깊은 어둠 속에서 조용히 잠들지만, 쓴맛 속에서 카카오 같은 단맛이 녹아들고, 우유와 설탕을 더할 때 균형이 매끄럽게 맞춰진다. 원두의 개성이 희미해진 자리에, 누구나 친숙하게 다가올 수 있는 안정적인 맛이 자리 잡는다. 그래서 에스프레소와 라떼, 그리고 카페 한쪽에 늘 머무는 아메리카노가 다크 로스팅을 가장 많이 품어낸다.


품종과 기후가 원두의 성격을 정한다면, 로스팅은 그 성격에 옷을 입히는 일이다. 어떤 옷을 걸치느냐에 따라 커피는 전혀 다른 인상을 남긴다. 그래서 한 잔의 커피는 언제나 똑같지 않다. 나는 그 미묘한 차이에 마음을 빼앗기고, 그것이 결국 내가 커피를 놓지 못하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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