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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식으며 드러난 또 다른 얼굴

물온도에 대하여

by 글은


한 잔의 커피를 내리는 일은 단순한 과정이 아니다.


원두의 상태, 분쇄 정도, 물의 온도, 추출 방식까지, 작은 요소들이 모여 한 잔의 맛을 결정한다. 하지만 나는 물 온도가 이렇게까지 커피 맛을 바꿀 줄은 몰랐다.


며칠 전, 예전에 마셨던 원두를 다시 꺼냈다. 이제는 어느 정도 루틴이 된 레시피로 주말 아침을 맞이하려 했다. 같은 드리퍼, 같은 분쇄도, 같은 비율. 변수가 없으니 맛 또한 익숙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물을 끓이던 순간, 냄비에서 수프가 넘치며 허둥지둥 정리하다 보니 물이 조금 식어 있었다. 그때까지도 몰랐다. 물 온도가 커피 향을 이렇게 바꾸리라고는.


추출을 마치고 한 모금을 들이켰을 때, 낯선 향이 입안 가득 퍼졌다. 평소에는 미묘하게만 느껴지던 향이 강렬하게 다가왔고, 이어 묵직한 단맛이 선명히 드러났다. 쓴맛은 거의 사라졌고, 전체적으로 훨씬 가벼운 인상이었다. 순간 혼란스러웠다. 똑같은 레시피인데, 왜 이런 차이가 난 걸까. 그렇게 물 온도의 중요성을 몸으로 깨닫게 되었다.


보통 커피의 적정 추출 온도는 90~96도 사이라 한다. 너무 뜨거우면 성분이 과도하게 추출돼 떫고 쓴맛이 강해지고, 너무 낮으면 충분히 우러나지 않아 밋밋한 맛이 된다. 그런데 오늘의 커피는 달랐다. 물 온도가 내려가면서 오히려 산미와 단맛이 강조되었고, 과한 쓴맛은 사라진 것이다.


나는 늘 물이 끓자마자 커피를 내려왔고, 그 차이가 이렇게 클 거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우연한 실수 덕분에 같은 원두의 또 다른 얼굴을 보게 되었다. 결국 한 잔의 커피는 수많은 변수가 빚어내는 결과였다.


그리고 그 변화를 받아들이는 태도에 따라, 커피는 새로운 경험이 될 수도, 그저 그런 한 모금으로 끝날 수도 있다. 이제는 물 온도를 조금 더 신중히 다뤄보려 한다. 때로는 더 뜨겁게, 때로는 더 식혀서. 그렇게 하다 보면, 같은 원두 안에서도 아직 만나지 못한 또 다른 얼굴을 발견하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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