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미 없는 한 잔이 주는 편안
한 잔의 커피를 마시다가 문득, 생각했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완벽한 커피’를 마셔왔을까.
감탄이 이어지면 혀끝의 감각은 예민해지고, 어느 순간부터는 매 한 모금이 작은 과제가 되기도 한다.
처음엔 매 순간이 경이로웠다.
첫 모금에 스치는 향, 입안을 채우는 바디감, 삼킨 뒤 남는 긴 여운.
싱글 오리진의 산미, 블렌드의 균형, 추출 온도에 따라 달라지는 미묘한 변주.
한 잔 한 잔이 스스로의 개성을 증명하려는 듯했다.
그런데 요즘은 문득, 산미가 거의 없는 커피도 좋다는 생각이 든다.
그 한 잔은 향을 구분하려 애쓰지 않아도 되고, 여운을 분석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마시고, 따뜻함이 몸을 채우도록 두면 된다.
완벽함을 느끼기보다, 편안함에 기대게 하는 맛.
어쩌면 이런 커피는 잠시 멈춰도 된다는 신호 같다.
머릿속이 복잡한 날에도, 손에 들린 잔을 무심히 기울일 수 있게 해준다.
집에서 마시는 머그 한 잔처럼, 특별한 이유 없이도 함께할 수 있는 친구 같다.
감탄을 기다리지 않는 커피,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 향,
그저 오늘의 시간을 부드럽게 흘려보내는 한 잔.
맛의 깊이와 개성을 좇는 기쁨도 있지만,
아무 생각 없이 즐길 수 있는 잔이 주는 여유도
그만큼이나 좋은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