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지 꽃

파리의 안나 67

by Anna

벌써 수요일이다. 아침 일찍 임무 수행을 마치고 할머니와 함께 식사를 했다. 오늘따라 입맛이 없으신지 빵을 잘 안 드셨다. 속이 불편하시냐고 물으니 잘 안 넘어간다고 하셨다. 결국 빵 몇 조각을 남기고 과일만 조금 더 드셨다. 피곤하신 것 같아 얼른 양치를 시켜 드리고 방에 들어왔다. 오전에는 늘 그렇듯 인터넷 서핑 후 단어 공부를 했다.


오늘 점심은 특별히 맥도날드를 사 먹기로 했다. 할아버지와 버스를 타고 몽파르나스 타워 근처의 맥도날드에 갔다.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사람이 정말 바글바글 했고 줄을 서 있는데 앞, 옆, 뒤로 시끄러운 젊은이들의 불어 소리가 내 귀를 괴롭혔다. 정신없던 기다림의 시간이 지나고 할아버지께서 주문하는 모습을 보며 옆에 서 있었다. 여전히 사방이 시끄러운 상태라 점원도 말을 잘 못 알아듣는 것 같았다. 한국에선 늘 불고기버거만 먹었는데 여긴 그런 메뉴가 있을 리 만무. 결국 빅 맥을 시켰다.


포장을 받아서 버스 정류장으로 갔는데 7분이나 기다려야 했다. 결국 집까지 걸어가기로 하고 천천히 걸었다. 날씨가 정말 좋았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딱 좋은 날씨! 번화가라서 그런지 젊은 친구들도 많이 보였다. 요즘 따라 삼삼오오 모여 있는 그들을 보면 왠지 더 외로워지는 기분이 들어서 싫다. 혼자인 게 좋을 때도 있었는데 요즘은 좀 외롭다. 집에 도착해서 오랜만에 먹는 햄버거를 흡입하고 쉬었다. 딱히 외출을 계획하지 않은 날이라 무료하게 시간을 보냈다.


심심해서 ‘사랑해, 파리’라는 영화를 찾아보았는데 18가지의 스토리를 가진 옴니버스 영화였다. 한 7개쯤 보고 재미없어서 꺼 버렸다. 그래도 영화 속에 나오는 파리의 곳곳이 눈에 익어 즐거웠다. 쉬운 불어는 귀에 들리기도 하고. 요즘 ‘미드 나잇 인 파리’를 다시 보고 싶은데 구할 방법이 없다. 바이러스 때문에 불법 다운은 싫다. 벼룩시장에 갔을 때 DVD를 팔기에 혹시 있나 싶어 살펴본 적도 있지만 CD를 구해도 어차피 내 노트북엔 CD롬이 없기 때문에 볼 수도 없다.


어쨌든 그렇게 심심한 오후를 보내고 있는데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마사지사도 이미 다녀간 후라 혹시 하고 나가보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박사님께서 크로노 포스트에서 왔다고 하니 내 택배일 거라 하셨다. 월요일에 보냈다고 했는데 수요일인 오늘 도착이라니. 정말 빠르긴 빠르다. 저번처럼 우체국에 맡겨둘 줄 알았는데 이번엔 택배기사가 직접 들고 집으로 찾아왔다. 당연한 건데 왠지 감동스러웠다. ‘pyo’라고 사인을 한 뒤 방으로 택배를 들고 갔다. 박스 안에 한가득 들어 있는 나의 겨울옷들! 이제 추위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 오히려 옷이 너무 많아서 걱정이다. 옷장을 가득히 채우니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이 많고 예쁜 옷들을 입고 만날 사람이 하나도 없다니 조금 서글펐다. 오늘따라 유난히 심심했다. 딱히 할 것도 없고, 볼 것도 없고, 너무 외로웠다.


지갑을 챙겨 박사님과 함께 꽃집에 갔다. 내일은 할머니 생신이시다. 저번부터 선물로 뭘 사드릴까 고민하다 결정한 화분을 사러 가기 위해서 말이다. 할아버지께 말씀드리니 뭐 하러 선물을 사냐고 하셨지만 그래도 같이 가주셨다. 꽃집엔 다양한 화분들이 있었는데 키우기 쉬운 꽃으로 사고 싶어 박사님께 부탁드리니 그냥 비싸지 않은 꽃을 사라고 하셨다. 할머니께서 빨간색과 보라색을 좋아한다고 하셨다. 꽃집 안을 둘러보니 정말 예쁜 보라색 화분이 있었다. 그런데 그건 가격이 19.90유로였다. 예쁘긴 하지만 나도 20유로를 쓰기엔 너무 큰 지출이라 생각되어 바깥으로 다시 나왔다.

작은 화분들을 둘러보다 할아버지께서 5유로짜리 작은 화분을 가리키며 이게 좋겠다고 하셨다. 이름 모를 작은 꽃이었다. 빨간색으로 고르고 계산을 했다. 주인아주머니께서 예쁘게 포장도 해 주셨다. 일주일에 한 번 물을 주면 된다고 하셨다. 할아버지께선 무려 49유로짜리 꽃다발을 사셨다. 역시 클래스가 다르군. 기분 좋게 집으로 오는데 할아버지께서 어떻게 그렇게 기특한 생각을 했냐고 하셨다. 모르면 그냥 넘어갔을 텐데 아는 이상 챙겨드리는 게 도리라고 생각한다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방 안이 너무 칙칙해 예전부터 화분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집에 들어와 내가 사 온 화분은 몰래 내 방으로 가져오고 할아버지께서 사신 꽃다발은 할머니 방 꽃병에 예쁘게 꽂아두었다. 혹시나 해서 할머니께 꽃을 좋아하시냐고 물으니 꽃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냐고 하신다. 우리 엄마는 싫어한다고 말씀드리니 놀라며 하하- 웃으셨다. 내일 아침 생신을 축하드리며 화분을 선물로 드려야지. 꽃 이름을 몰라서 ‘은지 꽃’이라고 이름 지었다. 내 이름을 기억 못 하시니 꽃이라도 기억에 남으시라고.


저녁을 먹기 전 숀리 다이어트를 하고 샤워를 했다. 여름보다 더 건조해져서 살이 많이 튼다. 바디로션을 듬뿍 발라도 소용이 없다. 한국에서 사 온 때 비누로 몸을 문질렀는데 때가 안 나온다. 왜 때 비누인 거지? 아무튼 맛있는 저녁 식사 후 요플레로 후식까지 먹었다. 하루 세 끼 꼬박 잘도 챙겨 먹으니 건강해지는 기분이다. 살이 쪄서 문제지만. 열심히 운동하면 되겠지.

keyword
이전 01화삼삼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