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안나 68
할머님의 생신이다. 비몽사몽 임무수행을 끝내고 아침을 기다리는데 어젯밤 할아버지와 언니의 작은 다툼을 들은 나로서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기다림이었다. 할아버지는 언니에게 미역국도 준비 안 하냐고 화를 내셨다. 반 강제적으로 준비된 미역국이 반가울 리 없었다.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나을 뻔했다. 어쨌든 아침을 먹으란 소리에 부엌으로 가니 할아버지께서 나보고 얼른 선물을 가지고 오라고 하셨다. 식사 끝나고 드린다고 하니 막무가내로 괜찮다 하셨다. 할아버지 때문에 서프라이즈는 망했다. 결국 나도 반 강제적으로 할머니께 생신선물을 드렸다.
별건 아니지만 그래도 놀라고 좋아해 주시는 할머니의 모습에 기분이 좋았다. 선물을 드리고 밥을 먹는데 아침 식사치고는 너무 과한 상차림이었다. 생신상이라는 부담에 언니가 무리를 해서 여러 가지 요리를 해두셨다. 어젯밤에 잠도 설치고 아침 일찍 뚜왈렛을 한 덕에 입맛이 없었는데 꾸역꾸역 다 먹었다. 밥을 먹고 화분 포장을 뜯어 물을 주고 잘 보이는 시계 앞에 두었다. 할머니께 저 꽃 이름은 ‘은지 꽃’이라고 절대 잊지 마시라고 당부했다. 분명 곧 까먹으실 게 뻔했지만 내 작은 소망이었다.
아침부터 과식을 해서 바로 운동을 할 수 없어 간단히 씻고 외출 준비를 마친 뒤 단어 공부를 했다. 하루에 3~5 단어 정도를 공부하니 부담도 덜 되고 재미있다. 점심은 한 시쯤 먹었다. 할머니의 장수를 기원하는 국수였다. 식사 후 잠깐 나갈 예정이었지만 할아버지와 언니가 방석을 사러 간다고 하셔서 할머니만 두고 집을 비우는 것이 마음에 걸려 외출은 포기했다. 영상통화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마사지를 해주시는 여순이 아주머니께서 오신 걸 확인 한 뒤 영화 ‘올드보이’를 보았다. 예전에 만화방에서 본 만화책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내용이었다. 그런데 어제 밤잠을 설친 탓인지 졸음이 몰려왔다. 네 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다섯 시 반이었다. 설마 뚜왈렛이 왔다 간 건 아니겠지. 내가 초인종 소리를 못 들었을 리 없어. 라고 생각하며 정신을 차리는데 마침 벨이 울렸다. 화장실에서 대야를 챙기는데 여순이 아주머니께서 이미 뚜왈렛을 다녀갔다고 말씀하시는 소리가 들렸다. 놀라서 할머니 방으로 가 여쭤보니 이미 케빈이 다녀갔고 잘 해결했다고 하셨다. 감사하고 죄송하다는 인사를 전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곧 저녁을 먹으러 나갈 시간이었기에 옷을 갈아입고 자두를 먹으며 기다렸다.
집 0층 식당에 한 번쯤 가보고 싶었는데 오늘이 그 기회였다. 7시부터 디너 타임이라고 해서 인터넷 서핑을 하며 시간을 보내다 20분쯤 집을 나섰다. 오랜만에 집 밖을 나가시는 할머니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지만 그래도 괜히 기분이 좋았다. 식당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아 손님 분들을 기다리다 먼저 음식을 주문하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곧 마리아 원장님과 성함은 모르는 남자 선생님이 오셨고 축하 인사와 함께 선물을 주셨다.
음식이 나오기 전 할아버지께서 여순이 아주머니와 민향 언니, 내 소개를 하는데 내가 워킹으로 왔다고 하자 마리아 원장님께서 무슨 일을 하냐고 하셨다. 언어가 안 돼서 일은 안 하고 있다고 말씀드리니 자신의 미용실에서 아르바이트할 생각 있냐고 물으셨다. 난 ‘정말 좋다’며 무슨 일이든 할 수만 있으면 된다고 했다. 내 번호를 받아 가시고는 미용실에 손님이 많은 날 연락하겠다고 하셨다. 내가 임무 수행 때문에 10시간은 못 하고, 아침부터 오후 4시까지 일하기로 간단히 합의를 보았다. 할머니 덕분에 일도 구하고! 큰돈은 아니라도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행복하다.
식사도 정말 배불리 했다. 전채로는 오랜만에 먹는 달팽이 요리였다. 와인과 함께 곁들이니 맛이 좋았다. 골뱅이도 잘 안 먹는 내가 프랑스에서 이렇게 달팽이를 먹고 있다니. 본식은 한국식 도가니 찜 같은 요리였다. 맛도 한국의 맛이었다. 양이 너무 많아 반 정도를 다 남겼는데 프랑스 식당도 남은 음식은 싸주더라. 그건 마리아 원장님께서 가져가셨다. 이번 주 일요일 성당에서 추석맞이 행사를 한다고 꼭 오라고 하셨는데, 할아버지와 함께 한 번 가볼 생각이다. 기분 좋은 식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곧 저녁 임무 수행 후 씻고 자야겠다. 기분 좋은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