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싸나

파리의 안나 82

by Anna

오늘도 날씨가 좋았다. 점심을 먹고 가방을 챙겨 나갔다. 잔디밭에 누워 사색을 즐기기 위해 돗자리도 챙겼다. 우선 소화도 시킬 겸 알렉산더 3세 다리까지 퀵 보드를 타고 쭉 갔는데 날씨가 너무 더웠다. 검은색 레깅스가 실수였다. 모든 햇빛을 다 흡수하는 것 같았다. 결국 에펠탑이 잘 보이는 그늘에 가 앉아 쉬었다. 땀이 났다. 그냥 눈앞에 보이는 저 그늘에 누워 쉴까 하다가 조금 더 기운을 내서 그랑팔레까지 갔다. 무슨 행사를 하는 건지 사람들도 많고 경찰도 많았다.


한 바퀴를 빙 돌아 다시 앙발리드로 향했다. 카지노에 가서 하이네켄 하나와 계산대 옆에 자리한 하리보 바나나를 하나 집어 샀다. 오며 가며 마주친 페인트칠 아저씨와는 빙그레 웃으며 인사했다. 어서 빨리 그늘에 내 몸을 앉히고 싶었다. 그새 내가 찜해둔 자리엔 한 커플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옆에 돗자리를 깔고 앉았다. 오랜만에 연락이 온 미래와 카톡을 하며 시원한 맥주를 마셨다. 하리보 바나나는 생각과는 다른 맛이었다.


갑자기 어디선가 흑인 아저씨가 나타났다. 말을 걸기에 쳐다보니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었다. 한국인이라고 하자 프랑스엔 왜 왔냐며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당황스러웠지만 간단한 대화를 주고받고 나도 예의상 당신은 프랑스인이냐, 나이는 몇이냐 하고 질문했다. 그의 이름은 라싸나. 28살의 프랑스인이다. 예전부터 흑인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바라고 원하던 흑인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냥 흑 아저씨였다. 그래도 그는 매우 친절했다.


나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하고, 내가 대답을 할 때까지 열심히 기다려주었다. 알렉스를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불어에 대한 한계를 느꼈다. 일요일마다 벼룩시장에 간다는 말이 하고 싶었는데 ‘벼룩시장’이 불어로 뭔지 알 리가 없지. 그래도 조금 즐거운 시간이 지나고 4시에 집에 가야 한다고 말하자 그는 먼저 일어났다. 나에게 핸드폰 번호를 묻기에 ‘네 번호를 알려줘’라고 하자 본인의 번호를 적어주고는 굳이 내 번호를 또 적게 하였다. 결국 번호를 주고, 그가 나에게 전화를 걸고, 걸려온 번호를 확인하기까지 했다.


그가 다음 주에 만나자고 해서 미용실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연락을 하겠다,라고 돌려 말한 뒤 우리는 작별인사를 했다. 순수한 의도로 접근한 건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지는 겪어봐야 아는 거겠지. 그래도 썩 나쁘지 않은 시간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쨍쨍히 해를 비추던 하늘이 점점 흐려지더니 이젠 마른하늘에 날 벼락이 떨어질 것만 같은 천둥이 쳐댔다. 얼른 짐을 챙기고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결국 소나기가 쏟아졌고 집에 거의 다 도착할 즈음에 비를 맞았다.


서둘러 가느라 덥고 비도 맞고 땀도 나서 굉장히 찝찝했다. 집에 오자마자 샤워를 하는데 욕조에서 살짝 엉덩방아를 찧었다. 맥주 500ml 마시고 술에 취했나? 어쨌든 씻고 나니 개운한 기분이었다. 미래에게 흑 아저씨에 대한 이야기와 아까 하다 말았던 다툼에 대해 말을 하고, 케빈이 와서 임무 수행을 마친 뒤 남자 친구와 카톡을 주고받았다. 어제 그리고 오늘 일로 나는 다시 그와의 헤어짐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지만 그것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나대로, 너는 너대로 서로를 사랑하는 거겠지.


라싸나 때문에 혼자만의 사색을 즐기지 못한 점은 아쉽다. 저녁은 간단히 라면을 먹었고 단어 공부를 위해 프잘사 카페에 들어갔다가 파리에 사는 워홀러들의 번개 제안 글을 보았다. 덕분에 내일 저녁 8시에 몽마르뜨 언덕 근처에서 30살 김지혜 언니를 만나게 되었다. 인생 선배가 필요했는데 잘 됐다.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다. 할아버지께 내일 밤 임무 수행은 하루만 빼 달라고 말씀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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