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 나잇 인 파리

파리의 안나 84

by Anna

어젯밤 지혜언니와 펍에서 맥주 두 잔씩을 마시고 헤어졌다.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즐거웠다. 좋은 인연이 될 것 같다. 오래간만에 저녁 음주를 해서 그런지 아침엔 입맛이 없었다. 과일과 요거트, 커피로 배를 채우고 뚜왈렛 후 쉬고 있었는데 할아버지께서 물을 사러 가자고 하셨다. 굳이 그 아침부터 나가야 하는 이유가 뭘까. 양치도 안 하고 세수도 안 한 상태여서 귀찮았지만 그냥 자일리톨 껌 하나 입에 넣고 따라나섰다.


간밤에 비가 조금 내려서 그런지 날씨가 선선했다. 토마토와 사과, 물을 사들고 집에 왔다. 정신을 차리고 씻기로 했다. 점심을 먹고 외출을 할 요량으로 화장까지 다 하고 어제 동열이가 보내 준 영화를 다운받았다. 프랑스에 오기 전 학교 도서관에서 홀로 봤던 영화 ‘미드 나잇 인 파리’가 요즘 들어 다시 보고 싶어 졌는데 파일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벼룩시장에 갈 때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DVD를 뒤져보기도 했었다. 하지만 통 보이지 않아 거의 포기하다시피 마음을 접었는데 오랜만에 연락이 온 동열이가 최근 그 영화를 보고 파리에 더욱 오고 싶어 졌다는 이야기를 해서 파일을 보내달라고 부탁을 했다.


올해 초 콜센터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친해진 동열이는 허물없이 농담을 주고받고 서로를 공격할 수 있는 친구다. 가끔은 내 억지도 받아주고 투덜거리긴 하지만 부탁도 잘 들어주는 편이라 좋아하는 사람이다. 최근 한국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비긴 어게인’도 함께 보내주었다. 나는 그 답례로 지금까지 여행하면서 찍은 사진들을 추려서 그에게 보내주었다.


그렇게 오전 시간을 보내고 점심 식사 후 외출을 하려는데 귀찮았다. 운동을 나가자니 날씨가 말썽이었고, 유럽 문화의 날 행사로 파리 이곳저곳에서 유적지를 개방한다는데 막상 찾아가기가 귀찮았다. 한국 유산도 관심이 없는 나인데, 프랑스 유산까지 알아야 하나? 싶었다. 결국 외출을 포기하고 마녀사냥을 보며 낄낄거리다 조금 무료하게 느껴질 즈음 ‘미드 나잇 인 파리’를 다시 봤다. 내가 보았던 곳, 내가 자주 가는 곳, 내가 살고 있는 곳들이 영화 속에 나왔다. 프랑스 파리에서 보니 더욱 새롭게 느껴지는 영화다.


저녁에는 할아버지 후배 분 중 한 분이 최근에 남편과 사별하고 그 위로 차 저녁 식사를 대접한다고 하셔서 외식을 하러 갔다. 사실 할아버지 후배 분들과 함께하는 자리에 내가 왜 끼여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할아버지 말로는 우리는 이미 ‘가족’이라기에 거절하지 못하고 따라 나갔다. 물론 할머니 수발을 들어야 할 사람이 필요해서였겠지만. 어색한 분위기 속 후배 분들이 오시고 미망인께서는 내 옆자리에 앉으셨다. 하지만 그분들 중 그 누구도 나와 민향 언니가 누군지 궁금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저 우리는 할아버지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무언가를 먹을 때 분위기를 중요시하는 사람이라 그 자리가 정말 너무나도 불편했다. 자기들끼리 희희낙락 즐거워하며 나에겐 계속해서 기념사진을 찍어 달라 요구하는 그들이 수준 낮아 보였다. 불편한 식사 시간은 두 시간가량 계속되었고, 민향 언니는 밥만 먹고 공부를 해야 한다며 먼저 집에 올라갔다. 결국 할머니 옆에는 내가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 누구도 할머니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유일하게 미망인께서 여러 질문을 했지만 치매 끼가 있으신 할머니가 제대로 대답 할리 없었고, 미망인께서는 말귀가 어두우셔서 두 분의 대화는 한 편의 코미디 같았다.


어쨌든 배불리 밥을 먹기는 먹었다. 디저트까지 해치우고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올라가는데 할아버지께서 무언가 바쁘셔서 내가 그냥 할머니 휠체어를 끌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사실 휠체어가 너무 꽉 껴서 탈 때도 힘들었고, 내릴 때는 누군가 문을 열어주어야 해서 갇힐 뻔했다. 하지만 할머니와 합심하여 문 열기에 성공하고 무사히 집까지 들어올 수 있었다. 정신적으로 많이 피곤한 상태였지만 곧이어 온 뚜왈렛을 무사히 마치고 할머니 양치까지 시켜드린 뒤 그제 서야 쉴 수 있었다. 내일은 좀 늦잠을 자고 싶은데 말이지. 앞으로 그런 식사 자리엔 절대 참석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keyword
이전 18화있을 때 잘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