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들이 움직이는 소리에 눈이 떠졌다. 여행의 마지막 도시에서의 첫날이 밝았다. 포르투에서 리스본까지는 버스로 4시간, 1시간을 걸은 끝에 찾아낸 호스텔은 마음에 들었다. 객실이 서너 개, 욕실이 두 개, 공용 부엌이 하나 딸린 이곳은 편안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풍긴다. 공용 주방에서 만난 사이먼은 유쾌한 친구였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혹시 한국인이냐며 한국말로 물었다. 처음에는 어느 나라 말인가, 하나도 못 알아들었지만 그의 옹알이 같은 발음을 몇 번 들었더니 신기하게 이해가 됐다.
런던 출신인 사이먼은 암스테르담에서 교환학생을 했는데, 그때 룸메이트가 한국인이었다며 그 친구한테서 한국말 몇 마디를 배웠다며 자신을 소개했다.
"너 사이먼 도미닉 알겠네? 우리 어머니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야."
"사이먼 도미닉 알지. 어머니가 좋아하신다고?" "응 내 이름은 사이먼이고 내 동생은 도미닉이거든. 그래서 그 부분만 자주 따라 부르셔."
그는 말을 마치고 사이먼 도미닉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는 몇 마디를 주고받고는 자연스럽게 함께 거리로 나갔다. 도시의 중앙에 자리 잡은 에두아르두 7세 공원은 완만한 경사길이 길게 펼쳐져 오르막을 다 오르면 지나온 길과 함께 도시가 내려다보인다. 멀리 바다가 보여 부산의 용두산 공원이 생각났다. 벤치에 앉아서 점심을 먹었다. 내가 오레오 쿠키를, 사이먼이 크래커를 나눠주었다. 화장실이 가고 싶어서 가까운 버거킹에 들어갔다. 유럽의 많은 패스트푸드점 화장실은 우리 같이 화장실만 쓰려는 사람들 때문에 영수증에 인쇄된 비밀번호를 쳐야 들어갈 수 있다. 우리는 화장실 문 앞에서 조금 기다렸다. 조금만 기다리면 누가 나오거나 들어가기 때문에 그때 문을 잡고 들어가면 된다.
리스본의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벨렝 지구까지는 버스로 1시간. 나와 사이먼 둘 다 인터넷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결국 길을 찾았다. 벨렝 지구에 내렸더니 맑은 하늘에 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우산이 소용없는 비바람이 쏟아졌다. 갑작스러운 비에 당황한 우리는 비싼 입장료를 물고 벨렝 탑 안으로 피할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근처에 카페가 있어서 그곳으로 뛰어들어갔다. 에그타르트를 먹으며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다행히 지나가는 비였는지 빵을 다 먹어갈 때쯤 구름이 걷히기 시작하며 다리 너머로 무지개가 떴다.
무지개를 실물로는 정말 오랜만에 봤다. 아마 몇 년 만에 본 것 같다. 곧 한국으로 돌아가는 지금 본 무지개는 분명 좋은 징조일 거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하늘을 닦아낸 듯 먹구름은 순식간에 없어졌고, 우리는 무지개가 뜬 방향으로 걸었다. 무지개를 향해 걷고 있으니 중학교 땐가 교과서에서 읽었던 김동인의 소설 <무지개>가 떠올랐다. 소년은 무지개를 잡고 싶었지만 잡을 수 없었다. 그 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도 무지개를 잡아보려 했지만 잡을 수 없었다며 포기하라고 소년에게 충고했다. 소년도 결국 무지개를 쫓는 것을 포기했다. 그러자 그는 갑자기 소년에서 할아버지가 되어버렸다. 그때도 무지개가 뭘까, 선생님이 불러주는 대로 막연히 짐작만 할 뿐이었지만 찝찝한 이야기라고 느꼈는데, 다시 생각해보면 꽤나 섬뜩한 이야기다.
다리를 향해 걷다 보면 보이는 거대한 기념물이 있다. 이 발견 기념비는 대항해시대를 연 자국의 역사를 기리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대서양을 향한 배 모양의 받침대 위에 먼 곳을 가리키는 사람들이 조각되어 있다. 선교사들은 십자가를 들었고, 기사는 칼을 찼고, 탐험가들은 짐을 짊어졌다.
"저게 발견 기념비래. 리스본에 와서 꼭 보고 싶었던 거야."
영국인 사이먼은 꽤나 감명을 받은 듯 보였지만, 나는 '발견 당한' 역사가 있는 사람으로서 조금 아니꼬웠다. 순수한 탐험가들의 항해가 아니라, 과거 유럽 열강들의 침략을 모험심과 진취성으로 포장해둔 냄새가 짙게 났다. 가장 먼저 탐험가와 선교사가 들어오고, 이어 교역을 위해 상인이 들어온다. 그리고 그걸로 여의치 않으면 결국에는 군인들이 들이닥쳐 빼앗아 가버린다.
우리나라는 침략과 수탈을 당한 나라지만, 그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인지 제국주의 열강이 내세운 사회진화론적 관점에서, 더 나아가 국가주의의 좁은 틀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국가와 집단의 영광을 마치 자신의 성취인 양 떠받들고 맹신하는 사람들, 마음만은 히틀러인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는 사실을 느낄 때 이따금 소름이 돋는다.
"이따가 여기 사는 친구를 만나러 갈 건데 같이 갈래?"
다시 호스텔로 돌아가는 길에 사이먼이 물어왔다. 우리는 운 나쁘게도 퇴근 시간에 걸려서 사람들로 가득 찬 답답한 버스 안에서 2시간을 보내야 했다. 나도 바로 호스텔로 돌아가는 대신, 사이먼을 따라 그의 친구 사만다를 만나러 갔다.
파리 출신의 사만다는 이베이에서 일한다. 퇴근길인지 사원증을 목에 그대로 걸고 나왔다. 해피아워 할인이 끝나기 전 충분히 마셔두기 위해 급하게 술을 들이켰다.
"나 한국 가본 적 있는데."
사만다는 휴대폰을 꺼내 그녀의 서울 여행 사진을 보여줬다. 경복궁, 홍대, 용인 민속촌, 북촌 한옥마을이 지나갔다. 한국 여행의 클래식이다. 나도 예전에 파리에 갔을 때 에펠탑, 나폴레옹 개선문, 루브르, 콩코드 광장만 찍었다고 말해줬다. 다음에 파리에 간다면 어디를 가야 할까? 하지만 파리보다 우선순위에 있는 곳들이 너무 많아 당분간은 못 갈 것 같다.
사이먼과 사만다를 따라 리스본 시내의 술집들을 돌아다녔다. 영국인 사이먼은 병맥주, 프랑스인 사만다는 압생트를 골랐다. 나는 데낄라를 주문했다. 곧 라임이 올라간 데낄라와 연초록빛 압생트가 샷 잔에 담겨 나왔다.
"압생트는 원래 불 붙여서 마시는 술 아니야?"
"나도 몇 번 그렇게 마셨는데 굳이 왜 그렇게 마시는지 모르겠더라고. 그냥 스푼 하나 올리고 설탕을 녹여먹는 게 난 더 잘 맞는 거 같더라."
쑥이 들어갔다는 압생트에서는 터키 술 라크 같은 아니스 냄새가 났다. 나에게는 화장품 맛 같이 느껴져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 향이다. 같은 술 네 잔을 시키면 할인을 해주는 행사 때문에 데낄라를 연거푸 마셔야 했다. 마지막 샷을 털어 넣을 때 정신이 아찔했다. 속에서 뜨거운 김이 올라와 코로 내뿜었다. 새벽부터 술집 밖으로는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오늘 비만 두 번째 맞네. 코트가 겨우 다 말랐는데."
우리는 투덜거리며 밤거리를 걸었다.
#173 크리스마스의 분위기
"오빠 잘 지냈어? 이 정도면 같이 여행하는 거 아니냐고 진짜."
마드리드에서 헤어졌던 소영이는 마침내 세비야를 거쳐 리스본으로 들어왔다. 나는 항상 그렇듯 리스본에서 뭘 할지 생각도 없이 왔지만, 소영이는 다 계획이 있었다. 그녀가 이끄는 대로 화요일과 토요일에만 연다는 벼룩시장으로 따라나섰다.
도둑 시장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에 얼마나 살 게 있을까 하는 마음에 돈도 얼마 안 가져갔는데, 그게 실수였다. 사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눈을 돌리기가 무서웠다. 소영이는 열심히 노점에 진열된 골동품들의 사진을 찍었지만, 나는 뭘 살까 고민을 한다고 그럴 생각조차 안 들었다. 빈티지 시계, 커피잔, 코트, 시디, 포스터까지 한아름 사다가 집으로 택배를 탁 부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시장이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다 보니 자석이나 엽서 같은 자질구레한 기념품들을 펼쳐놓고 난전을 펼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노점보다 집을 정리하다가 다락방에서 발견한 물건들을 가지고 나온 듯한 아저씨들이 펼쳐둔 물건에서는 눈길을 떼기가 힘들었다. 결국 시장을 정신없이 둘러보고 나설 때쯤엔 소영이에게 돈까지 빌려서 장만한 잡동사니 몇 개가 양손에 들려있었다. 나는 이런 벼룩시장에 약하다. 사마르칸트와 트빌리시의 벼룩시장에 갔을 때도 나를 유혹하는 구소련 시대 물건들을 안 사려고 속으로 끊임없이 '저건 집에 가져가면 예쁜 쓰레기일 뿐이다'를 주문처럼 되새겼다. 하지만 그건 가지고 나서야 느낄 일이고, 나는 여전히 사마르칸트의 노점에서 본 나침반이 박힌 소련 조종사의 손목시계가 아른거린다.
"그럼 점심은 뭐 먹을래?"
"뭐 먹지, 넌 먹고 싶은 거 있어?"
"생선 종류 어때? 내가 봐 둔 생선 요리 맛집이 있는데 거기로 갈까?"
소영이가 점찍어둔 식당을 찾아갔다. 걸어가다 보니 길이 낯이 익었다. 어제 사이먼, 사만다와 술을 마시며 지나다녔던 골목이다. 어제도 따라다니기만 했는데, 오늘도 그렇다. 우리가 찾은 식당은 꽤 비싸 보이는 곳이었다. 가죽 덮개가 씌인 메뉴판과 정중한 웨이터의 태도에 걱정이 됐다. 다행히 런치 할인은 넉넉하게 3시까지 적용됐다.
나는 생선구이를 별로 안 좋아한다. 입대 직전 사회에서의 마지막 식사가 훈련소 근처 식당에서 먹은 생선구이 정식이었다. 식당에는 나 말고도 머리를 박박 깎은 예비 군인들이 보였고, 입맛을 잃은 나는 마분지 맛이 나는 바싹 마른 가자미를 억지로 씹어 삼켰다. 그리고 그날 저녁, 공교롭게도 군대에서의 첫 식사로 조기 튀김이 나왔고 젓가락도 안 주는 곳에서 포크-숟가락으로 누렇게 눈을 뒤집고 누워있는 조기를 뒤적이며 눈앞이 깜깜해졌다.
하지만 이곳에서 먹은 생선 요리는 정말 맛있었다. 구이와 밥 위에 올라간 대구살 모두 부드러웠다. 보통 생선 껍질은 비려서 잘 안 먹는데, 생선 껍질까지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이거 먹으니까 갑자기 한국 가서 생선 먹고 싶지 않아? 나 원래 생선 별로 안 좋아하는데 고등어구이도 먹고 싶고 메로 구이나 생선찜도 맛있겠다..."
집에 간다고 생각하니 먹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 요즘 수첩에 리스트를 적어둔다. 일상이 돼버린 여행에서 탈출해 다시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기분이다.
우리는 만족스럽게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왔다. 해안을 따라 코르메시우 광장까지 걸었다. 내 호스텔이 있는 호시우 광장에서 큰길을 따라 걸어 내려오기만 하면 되는 곳인데 빙 돌아와서 그런지 꽤 먼 곳까지 걸어온 기분이었다. 포르투처럼 푸른 타일로 장식된 건물은 많이 못 봤지만, 색감이 예쁜 건물들이 많다. 건물들을 구경하며 바닷가에 닿았다. 해변에는 커다란 모래성이나 돌탑을 만들어두고 돈을 받는 사람들이 있었다. 물론 구경하는 건 자유, 자발적 기부금인 셈이다. 우리도 발걸음을 멈추고 추운 날씨에 티셔츠를 걷어올리고 모래성을 쌓는 건축가 혹은 예술가의 열정을 흥미롭게 구경했다.
코르메시우 광장 한편에는 커다란 트리가 설치되어 있었다. 곧 크리스마스다. 내친김에 크리스마스까지 보내고 집으로 갈까 생각도 해봤지만 그러기엔 집에 너무 가고 싶다. 넓은 광장에는 관광객 한 무리가 흩어져 사진을 찍고 있고, 그 사이로는 갈매기들이 비둘기처럼 설렁설렁 걸어 다녔다. 나에게 좋아하는 새를 물어보면 앵무새, 갈매기, 오리를 꼽을 것이다. 좋아하는 것과 별개로 멋있는 새는 까마귀지만, 가까이 두고 키우고 싶은 마음은 잘 안 드는 친구들이다.
광장 전면으로는 그대로 바다가 펼쳐져 있다. 우리는 바닷가 데크에 앉았다. 데크 아래로 파도가 쳤다.
"이대로 나가면 대서양이잖아, 언젠가는 대서양까지 배로 건너서 세계 일주를 하고 싶어."
비행기를 타지 않고 여행을 하겠다는 내 목표에 위배되지만 이미 터키와 조지아에서 비행기를 두 번이나 타버렸다. 하지만 다음에는 러시아와 알래스카 사이의 베링 해협이나 대서양을 배로 건너 비행기 없이 세계 일주를 꼭 해내고 싶다. 다른 여행자들에게 주워듣기로 로테르담에서 출항하는 화물선에서 일을 하는 조건으로 배를 얻어 타고 브라질로 갈 수 있다고 했다.
광장을 지나 길을 따라가면 언덕 위에 리스본 대성당이 서있다. 1755년 리스본을 강타한 대지진에서 살아남은 얼마 안 되는 건물 중 하나인 이 성당은 지진도 막아낼 만큼 견고하게 생겼다. 두꺼운 벽을 지나 들어간 성당 내부는 고요했다. 종교 시설의 이런 고즈넉한 분위기가 좋다. 비록 나는 종교는 없지만, 소원을 빌 기회가 생기면 놓치지 않는다. 성당 안에는 50센트를 내면 초를 하나 켤 수 있었다. 나는 작은 초를 하나 켜고 남은 여행의 무탈함을 빌었다.
#174 여행의 끝
날이 밝았다. 호시우 역에서 소영이를 만나 신트라행 기차를 탔다. 마침내 종착점을 향해 간다고 생각하니 괜히 비장한 마음이 들었다. 호카곶 혹은 카보 다 로카는 좁게는 포르투갈의 최서단 지점, 넓게는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땅끝이다.
'여기서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
포르투갈의 한 시인은 이곳에 대해 이런 멋진 말을 남겼다. 사실 나도 저 말에 이끌려서 호카곶을 종착지로 삼았다. 이때까지 내가 지나온 땅이 비로소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곳을 보고 싶었다.
리스본에서 신트라까지는 기차로 1시간, 신트라 역에서 403번 버스로 갈아탔다. 관광객들로 가득 찬 버스는 종점인 호카곶에 다다를 때까지 아무도 내리지 않기 때문에 처음에 자리를 못 잡으면 계속 서서 가야 한다. 30분가량을 꼬불꼬불한 시골길을 달려 버스는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도착해 승객들을 쏟아냈다.
우리도 버스에서 내려 바다 방향으로 걸었다. 길게 이어진 절벽 해안을 따라 대서양의 파도가 세차게 밀려들었다. 파도가 뾰족뾰족한 바위에 부딪치며 만들어내는 하얀 포말은 우유 거품처럼 짙었다. 세상의 끝으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곳이다. 그런 타이틀 때문인지 나도 누군가 저 바다 건너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넌지시 말해준다면 역시 그렇겠지, 하고 덜컥 믿어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람들은 절벽에 걸터앉아 바다를 바라봤다. 겁이 많은 우리는 절벽의 끝에서 멀찍이 떨어져 자리를 잡았다. 바닷바람이 거칠게 불어 머리가 날렸다.
"긴 여행의 끝 지점에 서있는 기분이 어때?"
넋을 놓고 바다를 보고 있는 나에게 소영이가 물었다.
"근데 진짜 아무 생각이 없어. 나도 의미부여라도 하면서 벅차오르는 느낌이 있을까 싶었는데, 그런 극적인 감정은 없네. 그냥 드디어 끝을 봤다는 것 정도? 사실 이제 집에 갈 수 있어서 기분은 좋아."
다소 김이 빠지는 감상평이다. 하지만 정말 그랬다. 벅차오르는 새로운 감정보다는 지나온 길들의 몇몇 장면이 떠올랐다. 힘들고, 재밌고, 무섭고, 눈물 나게 좋았던 순간들.
여행을 시작하기 전 써둔 일기에서 나는 대륙을 건너 서쪽 땅끝에 도달했을 때 어떤 기분일지, 그때도 이국의 이채로움을 느낄지 궁금하다고 적었다. 8개월 간 내가 길 위에서 본 것은 거대한 스펙트럼이었다. 그 띠 위에는 많은 사람들과, 그 수만큼 다양한 삶이 있었다. 국경을 한 줄 넘을 때마다 세상은 겉보기에 조금씩 달라졌지만 따뜻한 마음과 미소, 사랑과 그리움 같은 것들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실크로드를 지나 아시아와 유럽이라는 오래된 세계를 횡단하겠다는 다짐을 일단 이뤘다. 하지만 이런 여정이 이번 한 번으로 끝날 것 같지는 않다. 그러기에는 아직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다. 이번 판은 여행을 알아가는, 그 경험을 쌓는 기회로 삼기로 했다. 비록 지금은 집에 너무 돌아가고 싶고, 광어회와 김치찌개, 순댓국이 너무 먹고 싶지만 언젠가는 또 바다를 건널 것이다. 큰 바다의 수평선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해는 점점 넘어가고 있었다.
바다는 뿔뿔이 달아나려고 했다.
푸른 도마뱀 떼같이 재재발렀다.
꼬리가 이루 잡히지 않았다.
흰 발톱에 찢긴 산호 보다 붉고 슬픈 생채기!
가까스로 몰아다 부치고 변죽을 둘러 손질하여 물기를 씻었다.
이 애쓴 해도(海圖)에 손을 씻고 떼었다.
찰찰 넘치도록 돌돌 구르도록
휘동그란히 받쳐 들었다! 지구는 연잎인 양 오므라들고... 펴고...
_정지용, <바다9>
#175 뒷정리
체크아웃을 준비하면서 짐을 정리했다. 이제 필요 없는 물건은 버렸다. 샴푸, 바디워시나 다 떨어진 속옷, 양말도 다 버렸다. 레게머리를 하고 아침마다 방 안에서 발랄라이카인지 벤조인지 모를 현악기를 치며 버스킹을 준비하던 마틴이 내가 짐 정리를 하는 것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나 오늘 비행기 타러 가거든."
하루 벌어 하루 여행한다는 그에게 우산과 비상약, 남은 라면을 건넸다. 나는 짐을 덜어내고 조금 가벼워진 배낭을 어깨에 둘러멨다.
내 비행기 일정은 리스본을 출발해 이스탄불과 모스크바를 두 번 경유하는 편이었다. 이스탄불을 거치는 항공권을 발견하고 나는 친구들이 보고 싶어 일주일간 스탑오버를 했다. 영화가 끝난 뒤 나오는 쿠키영상처럼 내가 좋아했던 도시에서 잠깐 머물며 지난여름 이스탄불에서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을 다시 만났다.
"다시 이스탄불에 들른다고? 그럼 무조건 우리 집에 와야지!"
누르의 집에 초대를 받았고, 친구들과 여행을 마무리하는 일주일을 정신없이 보냈다. 이스탄불에 도착했을 때 나를 다시 반겨준 친구들을 보며 '나는 참 인복이 많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여행을 하며 도움을 받은 사람들은 셀 수도 없고, 나아가 친구까지 되어준 고마운 사람들이 많다.
모스크바를 경유한 비행기는 지루하게 인천으로 날아갔다. 기내식을 두 번이나 먹었는데 시간이 안 갔다. 승무원에게 부탁해 위스키를 한 잔 마시고 눈을 감았다. 깜빡 잠이 들었고, 몇 시간 뒤 비행기는 인천에 사뿐하게 내려앉았다. 몇 달 동안 이동한 거리를 되짚어 오는데 비행기로는 하루가 걸리지 않았다. 다시 좁아진 지구의 크기에 놀라며 한국땅을 밟았다. 칭다오로 향하는 페리를 타기 전 며칠을 지냈던 재하 집에 다시 들어갔다.
"고생했다."
이번에는 재하가 침대를 양보해줬다. 똑같은 방에 누워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지난 시간들은 다 꿈이고, 마치 내일 다시 배를 타러 인천항으로 떠나야 할 것 같았다. 다행히 다 지난 일이었고, 나는 하루를 더 쉬고 대구로 내려갔다.
집에 오랜만에 들어가면서 이질감이 하나도 안 들었다. 집을 이렇게 오래 비운 게 처음이라 뭔가 변해있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거의 모든 게 그대로였다. 안 쓰는 물건들이 다 내 방으로 들어와 창고가 되어 버린 것 만 빼고. 내 물건들을 어디 놔뒀는지 기억이 안 나서 찾는다고 애를 먹었다. 그동안 내 목숨처럼 지고 다니던 배낭을 내려놓고 짐을 풀었다. 대부분 바로 세탁기에 쑤셔 넣었지만, 다시 내 물건들은 제자리를 찾아갔다. 항상 구석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배낭도 그 자리로 돌아갔다. 우리는 언제 다시 여행을 떠날까, 그때까지 먼지가 안 쌓이게 커버로 잘 덮어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