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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감을 느끼기 위해 연애를 한다는 생각의 모순

연애란 모든 미지의 불안에 맞서는 일

by 해센스

연애를 하면 안정감이 생길 수 있을까?


안정감이란 예측가능성에서 오는 편안한 느낌이다. 타인은 미지의 세계이다.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어떤 사고가 그를 지배해 왔고, 그를 구성하는지, 어떤 미래를 꿈꾸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지 겉만 보고는, 또는 그 사람이 단기간에 말하는 것만 듣고는 다 알 수 없다. 오랜 시간을 함께해도 타인의 머릿속, 타인의 트라우마를 탐험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기회가 아니다. 나처럼 에세이를 쓰는 사람이라면 글을 통해 그 사람을 구성하는 생각과 트라우마를 조금이나마 탐험해 볼 수 있겠지만, 글을 통해 보여주는 것도 전체처럼 보이는 아주 일부일 뿐이다.


타인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나의 세계에 편입시킨다는 것은 내 세계의 예측가능성을 떨어뜨리는 일이다. 그래서 연애를 한다는 것, 결혼을 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삶의 지평을 또 다른 우주, 그 우주와 관련을 맺는 또 다른 우주에까지 확장시키는 일이고, 그로써 삶의 예측가능성을 떨어뜨리고, 이로 말미암아 안정감이 줄어드는 선택을 하는 것이다.


혼자보다 둘이면 더 안정적인 것 아니야, 돈도 혼자 버는 것보다 둘이 벌면 안정적이고, 아프거나 힘들 때 누군가가 옆에 있으면 안정적인 것 아니야라고 말할지 모르겠다. 안정적인 감정, 안정감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나의 파동과 연인의 파동이 x축 대칭을 이루어 서로의 파동을 완전히 상쇄한다면 안정적인 모양을 만들지 모르겠다. 하지만 사람의 감정과 인생은 그렇지 않다. 나의 트라우마와 상대방의 트라우마가 만났을 때, 나의 슬픔과 상대방의 분노가 만났을 때, 나의 분노가 상대방의 죄책감과 만났을 때, 두 개의 감정이 만나서 상호작용을 하면 훨씬 더 파동의 진폭이 커지고 모양이 난잡해진다. 혼자의 감정만이 있던 세상이 타인의 감정이 지배하는 세상과 겹쳐지면 겹쳐질수록 감정의 예측가능성은 떨어진다.


안정감을 느끼기 위해 연애를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좋아지고 호기심이 드는 나머지 삶의 안정감을 해치는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이 사랑이 없으면 살지 못하는 인간이 하는 일이다. 연애라는 무모한 선택, 결혼이라는 미친 선택은 사랑의 숙주가 되었거나, 안정감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오는 무모함의 숙주가 되어 발생하는 일이다.


마음이 평안하고 안정적이고 싶지 좋았다가 나빴다가 널뛰기를 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혼자만 알고 싶은 나의 비밀이 하나하나 까발려지는 경험, 오로지 나에게만 속하고 나의 결정에 따라 노출할 수 있는 나의 신체를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경험을 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있다 해도 극소수일 것이다. 그런데 연애는 이 모든 것이다. 타인에 의해 내 감정의 진폭이 커지는 것을 허락하는 일이고, 오직 나에게만 속하는 세계를 상대에게 보여주기 시작하는 일이다.


물론 연애를 하면서도, 감정과 비밀, 심지어는 신체도 나누지 않으려 하는 사람도 있다. 연애를 한다는 것은 심지어 이런 비밀주의자와도 연루될 가능성을 열어두는 무모한 일이다. 비밀주의자와 연애를 하면 안정감은 한없이 추락한다. 미지의 세계가 점차 지의 세계가 되어야 예측가능성과 그에게 느낄 수 있는 안정감이 상승하는데, 미지의 세계를 자신만의 영역으로 굳건히 유지하고자 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를 어떻게 판단하고 신뢰해야 할지 시간이 지나도 혼란스럽기만 하다.


연애라는 것 자체가 안정감과 결별하는 일이지만, 그 속에서도 인간인지라 안정감의 욕구를 갈망한다. 그래서 비밀주의자가 아닌 사람, 예측가능성이 높은 사람을 만나고자 한다.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소상히 꺼내 담담히 전해줄 수 있는 사람, 느끼는 감정을 말로 꺼내 제때 전달해 줄 수 있는 사람, 적당한 때에 신체를 보여주고 몸을 나누는데 거부감이 없는 사람을 만나려고 하는 것은 다름 아닌 DNA에 각인된 예측가능성과 안정감에 대한 욕구이다. 당신이라는 우주가 어떤 것들로 이루어졌는지 알고 싶은 것이다. 나의 우주와 만났을 때 서로에게 어떤 정도의 충격이 가해질지, 혹시나 폭발해서 부서져버리지는 않을지 가늠해 보고 싶은 것이다.


사람들이 루틴이 있는 사람을 좋아하고 믿을 수 있다고 느끼는 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안정감이라는 절대가치를 그 사람의 행동패턴이라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 확인하고 싶은 욕망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몇 시까지 출근을 하고 기사를 읽고 퇴근하고 운동을 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삶이 좋은 것은 갑자기 이 사람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지는 않겠다는 안정감 때문이다. 어디론가 내가 알 수 없는 곳으로 사라져서 연락이 두절되고 내 삶의 예측가능성을 떨어뜨리고 나의 감정의 하강 진폭을 크게 만들어버리지 않겠다는 믿음 때문이다. 매일 브런치에 글이 올라오면 오늘도 건강하게 생존했구나, 이 날은 이런 생각을 했구나 하며 미지의 세계가 조금씩 줄어드는 안도감을 주는 것이다.


한편, 안정감의 또 다른 정의는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내 감정의 일부를 전달해 줘도 안전하겠다는 믿음이다. 슬플 때 누군가의 옆에 있으면 내 슬픔이 전달될지 모른다. 그래도 이 사람에게는 내 감정을 조금 나눠줘도 되겠다, 조금 나눠주고 내가 조금 더 편안해져도 되겠다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안정감을 주는 사람이다. 나의 세계를 누군가에게 보여준다는 일, 특히 우정보다 조금 더 진하고 독점적인 관계에 있는 연인에게 나의 비밀을 하나씩 꺼낸다는 일은 불안감을 너무나 크게 자극하는 일이다.


2년 전쯤 나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 적이 있다. 새로운 사람에게 내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서, 연애를 한다면 예전부터 알던 사람과만 연애를 해야지 하고 다짐했다. 마음이 지금보다 단단하지 않을 때 했던 꽤 진지한 결심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런 결정도 사랑에 빠져버리게 되는 사람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안정감을 온몸으로 깨버리는 바보 같은 일이 사랑이고, 사랑이 시키는 일이 연애라는 이상한 결정이니까. 나를 결국 받아들이지 못해서 상처받아도 어쩔 수 없으니, 그 사람을 우선 알아가야만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불안에 온몸으로 맞서는 일이 연애이다. 데이트 신청을 거절하면 어떡하지? 사귀자고 했는데 거절당하면 어떡하지? 일단 사귀긴 했는데 얼마 못 가 헤어지자고 하면 어떡하지? 통화하다가 분위기가 안 좋아졌는데 다음날 헤어지자고 하면 어떡하지? 내가 브런치에 이런 글들을 썼는데 읽고 나를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면 어떡하지? 이 사람의 비밀을 알고 내 마음에 고민이 생기면 어떡하지? 이 사람을 내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함께하는 우리의 미래에 행복이 기다리고 있을까? 이 사람의 가족을 내가 가족으로 맞으면 내 인생이 전보다 행복할까?


이 모든 미지의 불안에 맞서는 것이 연애이다. 연애가 주는 안정감의 허상은 달콤하지만 얕고 불안의 심연은 깊고 어둡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과 불안을 함께 견디어 내는 것이 사랑이고 연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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