뽀모도로 파스타, 그리고 0.7인분의 저주

괴식열전 [24]

by 이그나티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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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드디어 익숙한 음식이 나왔다. 뽀모도로 파스타. 토마토 파스타.


마치 내가 이국 음식 헌터처럼 이 시리즈에서는 되어 있지만, 실제로 나는 뻔한 음식을 좋아한다. 그 뻔한 음식 중에서도 내가 특히 좋아하는 메뉴가 파스타이다. 나는 파스타를 정말로 좋아하는데, 매워서 먹지 못하는 봉골레 정도가 아니라면 모든 종류의 파스타를 다 좋아한다.


그리고 나는 단순히 파스타를 먹는 것을 떠나서 파스타를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 파스타는 집에서 만들기 정말로 간단하고, 또 저렴하다. 그리고 집에서 만들어도 밖에서 사먹는 것보다 결코 퀄리티가 떨어지지 않게 재현할 수 있다. 물론 업장과 동일한 수준을 재현하기 위해서는 다년간의 수련과 조리용 장비가 추가로 필요하겠지만, 7-80% 재현하는 것은 크게 대단한 기술과 장비가 없더라도 충분히 가능하다.


파스타의 초심자들은 대개 시판용 소스를 이용한다. 사실 이게 제일 간편하긴 하다. 면을 삶고 소스를 붓고 팬에서 휘저으면 끝이다. 아니 심지어는 그냥 그릇에서 비벼먹어도 된다. 요즘은 소스가 간편하게 잘 나와 있어서 라면보다 쉽게 해먹을 수 있는 것이 파스타이다.


하지만 그렇게 계속 먹다보면 시판소스 특유의 공장맛(?)에 질리게 된다. 그리고 시판소스가 은근히 가격대가 있다. 1, 2번은 그렇게 먹어도 계속 먹다보면 상당히 많은 비용을 지불하게 된다. 이 지점에서 요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직접 만들어 먹는 데 눈을 돌리게 된다.


직접 만들어 먹게 되면 단가가 더 내려간다. 일단 파스타 면 자체가 그렇게 비싸지가 않고, 또 시판용 소스가 아니라 토마토소스나 올리브유로 소스를 만들어 면수로 이멀전을 해 소스를 만들 경우에는 양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원가 2,000원대로 해 먹을 수도 있는 것이 파스타이다. 물론 치즈나 크림, 햄과 같은 고급 재료를 이용한다면 또 원가가 올라가겠지만 말이다.


만드는 것도 시판용 소스를 만드는 데 비해 그렇게 많이 어렵지도 않다. 뽀모도로 파스타를 기준으로 해서 본다면, 면을 우선 표시된 것보다 1-2분 정도 적게 소금물에 삶는다. 그래서 체에 받쳐두고 면을 삶은 물은 따로 모아둔다. 이번에는 올리브유에 마늘을 볶고, 거기에다가 홀토마토나 토마토 퓨레를 넣어 볶는다. 어느정도 볶아서 소스가 되면 거기에다가 아까 따로 덜어둔 파스타를 섞고, 면수를 2국자 정도 부어서 저으면서 토마토 소스가 면수와 유화되어 걸쭉한 소스가 되게 만드는 이멀전 과정을 거친다. 걸쭉한 소스가 되면 이제 완성이다.


물론 중간중간에 요령이 필요한 부분이 있어서 처음에는 잘 안될 수도 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굉장히 간단한 요리에 속한다.


나는 내가 요리 전문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내 요리에 대해서 과시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솔직히 파스타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는 편이다. 이런 간단한 종류의 경우에는. 나 정도의 초심자라도 전문점에서 파는 파스타의 7-80% 정도의 퀄리티는 따라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나는 파스타를 밖에서 거의 사먹지 않는다. 누군가가 자신의 미식적 교양을 자랑하면서 “XXXXX의 생면 토르텔리니 뽀모도로 파스타가 어땠고…” 운운하며 자랑을 하면 속으로 ‘나도 그 정도는 만들 수 있다고.’라고 응수하는 편이다. 집에서 만들어 먹으면 조금 낮은 퀄리티에 훨씬 배부르게,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렴하게 먹을 수 있는데 그걸 왜 사먹는단 말인가.


물론 내가 주위 사람들을 김빠지게 만드는 “집에서 해먹으면 얼만데.” 충은 아니다. 내 주위에도 꼭 그런 사람들이 있다. 누군가에게 식사를 대접하면, “이게 집에서 해먹으면 얼마고… 돈이 아까워서 어쩌고…” 하면서 김을 팍 빼 놓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 되지 않고 싶다.


하지만 내가 밖에서 파스타를 사먹지 않는 데에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다. 바로 밖에서 파는 파스타의 메뉴 구성에 섞인 은은한 차별의 향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가 멋대로 만든 이론인데, 나는 한국의 외식업계에는 ‘0.7인분의 저주’가 만연해 있다고 생각한다. 0.7인분의 저주란 이런 것이다. 식당에 혼밥을 하러 가면 꼭 1인분을 시키면 모자라고, 2인분을 시키면 많아서 남기는 일이 생긴다. 내가 돼지(?)라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 수도 있지만, 식욕이 없는 날에도 이런 일이 반복되자 어떤 ‘패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어쩌면 1인분이 처음부터 1인분이 아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우리나라의 많은 식당 주인들은 애초에 자신의 테이블에 2명이 와서 3개의 메뉴를 시키게끔 메뉴를 구성한 것이 아닐까? 라는 의심을 하게 된다. 즉, 메뉴 1개를 실제로는 0.7인분 정도의 양으로 구성하게 되면 1명이 먹으면 모자라고, 1명이 2개를 시키면 1.4인분이 되어 너무 많다. 그렇지만, 2명이 와서 3개를 시키면 2.1인분이 되어 약간 넉넉한 수준의 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혼밥을 하러 가서 주위의 테이블을 쳐다보면 대개 2명이 와서 식사메뉴 1가지씩을 시키고, 요리 1가지를 더 시켜서 나눠먹는 식으로 주문을 한다. 어쩌면 이것이 식당 주인들이 처음부터 의도한 그림이 아니었을까?


예를 들어서 중국집에 가면, 항상 짜장면 1그릇을 시키면 뭔가 모자라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혼자서 짜장면 1그릇과 탕수육을 시키면 너무 많다. 2명이서 가서 짜장면2그릇을 시키고, 탕수육을 하나 시켜 나눠먹으면 딱 맞게 양이 구성되어 있다. 실제로 그렇게 시키면 할인을 해주는 세트메뉴가 있는 곳도 많다. 이정도 되면 나의 의심도 어느정도 근거가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파스타는 대표적으로 이 0.7인분의 저주에 걸려있는 메뉴라고 생각한다. 내가 파스타를 밖에서 사먹지 않는 이유는 그것의 원가와 만드는 과정을 알아서인 것도 있지만, 애초에 이것이 혼밥 손님에게는 팔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파스타 1그릇의 양은 굉장히 적어서 그걸 하나 시켜서는 밥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파스타를 2그릇 시키거나, 파스타와 다른 메뉴를 시키면 이번에는 또 양이 많아서 밥을 남기게 된다. 파스타 전문점의 경우 대개 2명이서 가서 각자 파스타를 1개씩 시키고 화덕피자를 하나 추가해서 나눠먹으면 되는 구조로 되어있다.


한국 식당의 특유의 0.7인분의 저주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일본여행을 가보면 된다. 일본 식당의 대부분은 1인분은 1인분의 양으로 되어있다. 규동이나 라멘집의 1인분 식사메뉴의 경우 양이 제법 되기 때문에 한사람이 가서 한그릇을 시키면 한끼 든든하게 먹고 나올 수 있다. 그리고 1인분의 경우에도 양조절을 할 수 있는 곳이 많다. 기본 사이즈가 적은 경우에는 아주 적은 요금만을 받고 양을 늘려주거나, 혹은 공짜로 양을 더 주는 곳이 많다.


애초에 일본 식당들은 혼밥을 디폴트로 설계되어 있다. 혼자 가서 먹어도 양이 적당한 경우가 많고, 좌석 구성 역시 카운터석이 많아서 4인 테이블을 차지해서 눈치를 볼 필요도 없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꼭 요리메뉴를 하나 더 시켜야 식사가 성립하는 경우가 많고, 좌석 역시 대부분이 4인 테이블이다. 애초에 혼자서 가면 눈치도 보이고 불편하다. 만약 식당 주인들이 이것을 계획했다면 아주 스마트한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고객들을 배려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대한민국의 그 많은 식당 주인들이, 특히 10년 이상의 업력이 되는 베테랑 식당 주인들이 이러한 사정을 모를 리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굳이 따지자면 0.7인분의 저주는 미필적 고의 이상의 의도가 깔려 있다는 가설이 진실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을 입증하려면 추가적인 증거가 필요하겠지만.


0.7인분의 저주가 식당 주인들의 의도라고 본다면, 한국의 식문화는 1인 손님을 의도적으로 배척하도록 만들어진 부드러운 형태의 아파르트헤이트인지도 모른다. 20세기까지만 해도 차별은 공적 공간에서 노골적으로 행해졌다. 여성은 입학이 금지된 학교라던지, 혹은 흑인이 앉는 것이 금지된 버스 좌석과 같은 경우처럼 말이다.


하지만 자유민권운동과 리버럴리즘의 흐름에 밀려 이러한 노골적인 차별은 적어도 우리의 눈앞에서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후발적 근대국가인 한국의 경우에도 외국물을 먹은 높으신 분들의 배려로 적어도 성별, 소득, 인종 등에 의한 노골적인 차별을 받지 않아도 되는 은총을 우리는 누리고 있다.


하지만 현대 한국의 도시 공간에서 정말로 차별의 구조가 소멸했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나는 차별의 구조가 보다 알아차리기 어렵고 부드러운 형태로 모양을 바꾸어 여전히 우리 주위에 잠복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세계의 주요 대도시는 더 이상 게토를 운영하지 않지만 여전히 인종이나 소득 등에 따라 주거공간과 생활공간이 상당히 다르다. 음식물 쓰레기 국물이 바닥에 눌러붙어 있고, 폐휴지를 줍는 노인이 카트를 미는 못 사는 동네와 온도와 습도가 조절되고 부드러운 조명이 나를 감싸는 부촌의 차이는 여전히 존재한다. 물론 그 누구도 가난한 사람이 부촌에 가는 것을 막는 장벽은 존재하지 않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실제로는 부촌에 좀처럼 발을 들여놓지 않는다. 이것은 여전히 도시의 디자인 자체가 계층에 따라 생활공간을 다르게 하게끔 되어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0.7인분의 저주 역시 마찬가지의 논리가 아닐까? ‘혼밥 손님 거절’과 같은 무지막지한 방법을 쓴다면 손님 뿐 아니라 소셜 미디어에서 두드려맞고 그 가게의 평판은 땅바닥으로 떨어질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많은 식당 주인들은 여전히 ‘혼밥은 객단가가 낮으니 2인이 와서 3접시를 시키는 커플 손님을 받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혹은 ‘혼밥을 처량하게 먹는 사람들보다는 옹기종기 모여서 여럿이 식사하는 그림을 만드는 것이 우리 가게의 이미지 메이킹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거나 ‘혼자서 스마트폰을 보면서 밥을 떠먹는 녀석들의 꼴도 보기 싫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것을 위해 의도적으로 메뉴의 양을 조절하는 “넛지”를 하는 것은 아닐가? 혹은 자신들의 메뉴가 그런 효과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알면서도 방치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내가 피해망상적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단언하는 말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하지만 적어도 식당을 방문하는 입장에서 한국 식당의 파스타 메뉴 구성은 나와 같이 혼밥을 주로 하는 사람에게는 굉장히 불리하게 되어있고, 환영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준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파스타를 집에서 만들어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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