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소중한 사람이 우울증이었습니다>를 쓰면서 엄마와 전화로 많은 이야기를 했다. 글 한 편을 완성할 때마다 엄마와 통화를 하며 글 내용에 틀린 것이 있는지 확인하고, 당시의 심정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다음에 쓸 내용에 대해서도 말했다.
2년 전, 엄마가 중증 우울증일 때 의사 선생님께서는 엄마에게 마음속 볼록렌즈를 찾아보라고 하셨다. 그때도 엄마와 같이 산책하며 마음속 볼록렌즈에 대해 잠깐 이야기를 나누긴 했었다. 나는 이번에 엄마에게 <소중한 사람이 우울증이었습니다> 13장은 그것에 대해 쓸 예정이니, 더 자세하게 이야기해 달라고 했다.
지금부터는 엄마의 이야기를 엄마가 나에게 말해 주는 형식으로 독자 분들께도 들려주려고 한다.
너도 알지? 내가 초등학교 졸업하고 집안 형편 때문에 중학교에 못 들어간 거. 그때 내가 14살 때였지. 아침에 일어나면 또래들은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가는데, 나는 그걸 멀뚱히 쳐다보고 있어야 하는 게 너무 슬펐어. 나도 교복 입고 학교에 가고 싶었는데 남들 공부할 때 나는 엄마 아버지 농사일 돕고 남의 집 일 도와주러 다니고... 그게 너무 서글펐어. 우리 집 뒤에 논 기억나지? 한 번은 아침에 거기 논뜰에 가서 엉엉 운 적도 있어. 왜 나는 남들 다 다니는 중학교에 다니지 못하나 싶어서.
나는 배우지 못하면 평생 엄마 아버지처럼 힘들게 농사짓고 일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무슨 일이 있어도 공부해야겠다고 다짐했지. 근데 공부를 너무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공부할 수 있는지 모르겠는 거야. 그러다가 우연히 '대농'이라는 회사에 다니면 야간 중학교를 다닐 자격이 된다는 소문을 들었어. 그래서 내가 어린 나이에 거길 들어가서 3교대 근무를 했거든? 거기가 집에서 걸어서 한 시간 거리였는데 매일 걸어 다닌 거야. 밤 10시에 근무 끝나고 집에 오는 그 길이 너무 무서웠어. 어느 날은 밤에 혼자 가는데 웬 나쁜 놈이 뒤에서 내 목을 확! 잡아당긴 적도 있었거든? 다행히 근처에서 사람 소리가 나니까 그놈이 도망치더라.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지금까지도 그때 일하고 비슷한 악몽을 꾼다니까. 아무튼, 야간 중학교 다닐 수 있다고 해서 그렇게 다닌 거였는데 무슨 이유인지는 잊어버렸지만 중학교를 못 다닌다더라. 그래서 그 회사는 그만뒀어.
그 후에도 어떻게든 공부하고 싶어서 청주여자중학교에 야간 중학교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거기 교무실을 혼자 찾아갔어. 나도 참 적극적이었지. 근데 거기서도 결국 중학교는 못 다녔어. 그래도 계속 배울 수 있는 곳을 찾아다녔어. 심지어는 '학원'이라는 말만 듣고 타자 학원을 등록한 적도 있다니까. 뭐 내가 원하는 공부가 아닌 걸 알고 금방 그만뒀지만. 근데 그 과정에서 '자활학교'라는 걸 알게 됐어. 대학생들이 자원봉사로 가르쳐 주는 곳이었는데, 거기를 다니면서 내가 얼마나 신이 났는지 몰라.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좋았어. 헌책방에서 산 문제집을 풀고 또 풀고, 만원 버스 안에서도 걸어가면서도 내가 공부한 것들을 보며 외우면서 갔고, 연습장은 빈 곳이 없을 정도로 빽빽하게 썼어. 공부하는 게 너무 재미있었어! 수학은 내가 너무 이해가 안 가서 답답했는데, 우리 오빠가 대학을 나왔으니 알겠다 싶어서 오빠한테 가르쳐달라고 했었어. 그렇게 수학을 알고 나서는 방정식과 함수가 얼마나 재미있던지!
그러다가 자활학교에서 같이 공부하는 언니가 중학교 검정고시를 합격했다길래, 나도 밤을 새워 공부해 가지고 검정고시를 세 번 도전해서 합격했어. 그때가 내 나이 20살 때쯤이었어. 20살이 되어서야 나 중학교 졸업한 사람이 됐어. 시험을 보면서도 문제가 쉬워서 합격할 줄 알았어. 근데 내 점수가 너무 궁금한 거야. 그래서 도교육청인가 거기로 가서 점수를 물어봤어. 그런데 담당자가 내 이름을 듣고 놀라는 거야. 왜 그런가 하니, 내가 영어 점수가 전국에서도 최고 점수 수준이라는 거야! 기분이 날아가는 것 같았어!
나는 계속 배우고 싶었어. 그래서 22살이 되었을 때는 방송통신고등학교를 다녔지. 정말 행복했어. 나한테도 드디어 선생님이 있고, 음악, 미술, 과학 등 배우는 과목이 있다는 게 말이야. 나는 방송통신고등학교를 1등으로 졸업했어. 그때 너무 좋았는데 이런 생각도 들더라. '아, 내가 형편이 돼서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으면 서울대도 노릴 수 있었을 텐데.'
나는 이렇게 공부에 대한, 학벌에 대한 집착이 높았던 사람이야. 나는 나하고 비슷한 학벌인 사람 만나면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할까 봐 결혼도 하기 싫었어. 그러다가 엄마가 절대 생각할 수 없는 학벌을 가진 너네 아빠를 만났지. 너무 좋았고, 아빠 같은 사람을 만난 거에 만족해서 공부를 더 이상 하지 않았어. 그다음부터는 너희들 교육에 힘을 썼지. 난 절대로 내 자식들을 나 같이 살게 하고 싶지 않았어. 돈이 없어서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는 거 말이야. 그리고 내 자식들은 우리 형편에 최고의 교육을 받게 해 주고 싶어서 악착같이 돈을 모았지. 언니랑 너, 특히 어린 네 동생을 놔 두고 그렇게 알바에다가 공장에다가... 그게 다 나는 피죽을 먹고 살지언정 자식들은 좋은 대학 나와서 좋은 직장에 보내고 싶어서 그랬던 거야. 그럼 나보다 나은 삶을 살겠지 싶어서.
근데 너도 알지? 내가 그거 때문에 너희 아빠하고도 싸우고, 너희를 힘들게 한 거. 특히 언니. 나는 네 언니는 조금만 더 신경 쓰면 서울대에 보낼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언니한테 너무 많은 상처를 줬지. 지금 생각하면 그게 다 욕심이었고 부질없는 거였어. 미련했던 거지.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뜻하신 대로 가는 건데, 내가 괜한 욕심을 부려서 언니를 힘들게 한 거야. 그걸 너무 늦게 깨달았어...
나는 평생 내 부족한 학력이 부끄러웠어. 다른 사람하고 긴 이야기도 못했어. 얘기하다 보면 내 부족한 지식이 다 드러날까 봐... 누가 나한테 뭐라고 하면, 상관없는 이야기인데도 그게 내 부족한 학력을 비웃는 거 같이 느껴졌고, 사람들이 나 무식하다고 무시하는 거 같았어. 그게 콤플렉스여서 그랬던 거야. 그래서 가족들한테도 상처를 많이 줬었지. 다른 사람이 나한테 뭐라 하면 "그래, 내가 무식해서 그래!"라고 하고 말이야. 네가 언젠가 나한테 말한 적 있지? 우리 가족 중에서 엄마가 학교를 못 다녔다고 무시하는 사람은 엄마 자신뿐이라고. 그래, 그 말이 맞아. 내가 나 스스로를 옭아매었던 거야. 그게 다 예전에 그렇게 계속 공부하고 싶었는데 하지 못한 트라우마였던 거야.
아무튼... 나는 그때(2019년 말) 그 애(전편에서 언급한, 엄마가 특별하게 생각한 '그 사람')한테서 나와 같은 모습을 봤어. 나는 걔를 내 자식처럼 생각했었어. 걔가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했니. 머리도 좋으니 노력하면 될 애라는 걸 알고 있었는데, 부모가 지원을 못 해 줘서 일하느라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고 결국 시험에 떨어진 게 나는 너무너무 마음이 아팠어. 공부를 하고 싶은데, 하고 싶은 게 있는데 돈이 없어서 못하는 게 얼마나 서글픈 일인지 내가 너무 잘 알아서, 과거의 내가 생각이 나서... 내가 돈을 지원해 주겠다 말하려고까지 했는데, 그게 걔의 자존심을 건드릴까 봐 차마 그러질 못했어. 근데 걔가 그렇게 준비한 시험에 떨어지고, 또 안 좋은 일까지 생겼잖니. 나는 너무 미안했어. 내가 도와줬으면 시험에 붙었을 수도 있었는데, 내가 걔를 낭떠러지로 보낸 것 같아서. 오죽하면 우울증이 재발하고 한동안 안 먹던 우울증 약을 또 먹기 시작했겠니. 다른 사람들은 다 나를 이해 못 했고, 그 애는 괜찮을 거라고 했지만, 나는 너무 미안하고 안타까워서 도저히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었어. 결국에 그 애는 나중에라도 시험에 합격했고 지금 잘 살고 있는데, 그땐 정말 그렇게 생각했어. 어차피 다 순리대로 흘러갈 것을...
'난 예전에 공부를 하고 싶어도 못 했어. 그게 내 한이야.'라는 말은 엄마에게 지겹도록 들었었지만, 이렇게 자세하게 사정을 들어본 적은 없었다. 그리고 그 당시 엄마의 심정도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심지어 학교에 다닐 때는 엄마의 공부 못 해서 한이라는 소리는 결국 '그래서 너희는 엄마를 위해서라도 공부를 잘해야 한다'로 이어졌기에 부담이 되기도 했다. 이번에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의 '엄마'가 아닌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을 뿐인 가난한 가정 14살 소녀의 모습이, 공부를 하고 싶어 이곳저곳 찾아다니고 늦은 밤 홀로 논길을 걸어오는 소녀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 그 시절의 엄마를 안아주고 싶었다.
문득 20년 전 기억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마지막 방학 때 집에서 혼자 놀고 있었는데, 내가 입학할 중학교에서 전화가 왔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학교에 오늘까지 내야 하는 어떤 돈을 안 아직 냈으니 오후 몇 시까지 꼭 내라는 것이었다. 나는 동네 작은 공장에서 일하고 있던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학교에서 한 말을 전했다. 엄마는 깜짝 놀라면서 지금 당장 돈을 내러 가겠다고 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빈둥빈둥 마저 놀고 있었는데, 잠시 후 엄마한테 다시 전화가 왔다.
엄마는 학교에 돈을 냈다며 나에게 이런 중요한 걸 깜박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중학교는 의무교육인데 그 돈 좀 늦게 냈다고 별일이 생기겠는가 싶었다. 그런데 엄마는 아니었다. 엄마는 '희숙아 엄마가 미안해, 너무 미안해. 내가 미쳤지 그거 하나 제대로 못 챙기고.'라는 말만 반복하며 펑펑 울었다. 내가 괜찮다고 하는데도 계속 계속... 나중에 엄마가 말하길, 그 돈을 안 내면 내가 중학교에 못 들어가는 줄 알았다고 한다.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고 나서도 엄마는 그 일을 나에게 계속 미안해했다.
전에는 그냥 나한테 미안해서 저렇게 울었구나 싶었는데, 과거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20년 전 그때의 엄마 심정이 어땠을지 상상이 되어 가슴이 아파서, 엄마와의 통화를 마치고 눈물을 참지 못하고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