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화(和), 조화로움에 관하여
3. 헛됨의 만족, 사비(さび)
다실에 앉아 차를 마시는 것은 다실이 없음을 깨닫기 위함입니다. 리큐는 다실 안의 갖가지 재료들과 도구들의 색과 모양이 서로 중복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을 썼습니다. 존재는 반드시 서로에게 의존하여서만 의미를 얻는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의존관계에 자의적으로 용도를 부여하고 그에 어울리는 이름을 임시로 붙여놓습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 이름을 실체로 인정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름에 앞서 갖가지 조각들이 끊임없이 연기緣起(1)하지 않았다면 다실이라고 부를만한 것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름 붙일 곳을 잃고 다실의 공空(2)함을 보는 것이 곧 실상을 보는 것입니다.(3) 눈앞에 펼쳐진 것은 갖가지 요소들이 서로 의존하여 맺는 인연의 정황일 것이며, 정황은 요소들이 얽힌 관계의 맥락을 파악한 것이기에 실체로 인정될 수 없습니다.
1) 연기(緣起) : 세상의 모든 현상은 상호 의존하여 발생하므로 자력으로 일어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불교의 생멸론.
2) 공(空) : 상호 의존관계를 통하여 일어나는 일에 이름을 붙여 대상으로 삼는 것을 비판하기 위해 이름이 가리키는 대상이 비어있음을 뜻하는 말.
3) 『금강경』(金剛經)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의 한 구절. “형상을 가진 것은 모두 허망하다. 만약 모든 상에서 허상을 보게 된다면, 곧 부처를 보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