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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화(和), 조화로움에 관하여
찻잔을 집어 들었을 때 ‘찻잔’이라는 이름의 흔들림을 봅니다. 손에 쥐고 있던 것은 흙과 유약과 불길의 결합물일 뿐, 그 자체로 차를 따르는 도구로 사용되어야 한다는 당위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단지 나의 손이 그것을 찻잔으로 사용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찻잔의 용도와 이름이 근거를 잃은 뒤에는 무엇이 남을까요? 이름을 잃어도 대상화 작용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것이 사물이 아닌 의미(‘나’에게 알려진 것)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찻잔이라는 이름의 쓸모가 사라지더라도 그것은 다른 관계 속에서 다른 이름과 이미지로 ‘나’에게 알려집니다.(1) 찻잔을 이루는 요소에는 흙과 유약과 불길 외에도 그것을 찻잔으로 규정했던 ‘나’의 관점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보는 자와의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이름의 공함을 보는 것은, 사물이 아닌 의미의 연기 작용을 보는 것이며, 그 의미를 일으키는 자신의 공함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비어있는 공책처럼 무엇이든 쓸 수 있는 무한한 의미의 가능성을 나타냅니다.
1) “기표가 외부의 지시 대상과 관련한 이해관계 속에서 자유를 얻더라도 그것은 결코 지시성에서 풀려나 부유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시 대상은 다른 텍스트들 및 다른 이미지들이 된다.” 폴 래비노(Paul Rabi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