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픈거 다해보기-어버이날 꽃바구니 만들기
37년째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가족의 마음을 기쁘게 하기도 아프게 하기도 하는 짓을. 마음을 헤아린다는 건, 그중 가족의 마음은 유독 어렵다. 마음은 생명과도 같아서 목숨만큼 소중한 것이기에 간혹 마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도통 잘 모르겠다. 대상이 내게 소중한 사람의 마음이라면 더 어려워진다.
마음을 헤아리고자 할 땐 차라리 나와 아무 상관없는 모르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편이 더 나을 때가 있다. 가령 모르는 누군가와 같이 엘리베이터를 탈 때 상대가 다 탈 때까지 열림 버튼을 눌러준다던지, 같이 수업을 듣는 수강생이 손을 다치면 하던 일은 접어두고 다친 손을 치료하는데 기꺼이 나선다던지, 안면도 없는 사람의 SNS 슬픈 감성팔이에 공감한 나머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위로의 댓글을 써재낀다던지.
그 사람이 만약 나와 오래된 가족이었다면 내 행동은 달라졌을까. 엘리베이터 버튼을 끝까지 눌러줬을까. 다친 손을 치료하는데 하던 일을 멈췄을까. 슬픈 감성팔이에 위로를 건네었을까.
아니다.
난 남들에게는 좋은 사람이면서
내 가족에게는 나쁜 사람이었다.
엄마가 손을 다쳐도 심해 보이지 않으면 내가 하던 일을 마저 하고 엄마에게 다가갔으며, 친오빠의 감성팔이에 위로는커녕 핀잔과 비난을 쏘아댔고, 나를 위해 새벽같이 일어 나준 아빠에게 감사는커녕 짜증을 냈었다. 내 가족이 남이었다면 나한테 그런 취급을 받지 않았을 테지.
37살. 불효녀로 산다는 건 마음으로는 잘못됐다는 걸 알면서도 또다시 같은 패턴으로 행동하는 나와 마주하는 일의 반복에 괴로워하는 삶의 연속이다. 그 와중에 효자 노릇을 해보겠다고 엄마가 만든 음식 맛있게 먹기, 부모님을 힘들게 하는 사람 같이 욕하기, 집에서 밥을 얻어먹게 되면 설거지는 내가 하기, 좋은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말하기, 인터넷이 서툰 부모님을 위해 온라인에서 구매하면 더 할인 폭이 큰 것들 구매 하기, 집안에서 일어나는 자질구레한 잡일하기(전구 갈기, 떨어진 샤워 커튼 다시 끼우기, 인터넷 TV 바꾸기, 정수기 교체하기, 보이스 피싱 분간하기, 고장 난 샤워기 바꾸기 등)따위 같은 것들이다. 이것들이 과연 효자의 노릇인지도 불효자는 알지 못할 노릇이다.
내가 잘 알지 못하는 남에게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건, 어쩌면 남과 나는 아무런 추억이 없기 때문인지 모른다. 서로가 길들여진 적이 없기 때문에 상식적인 선에서 해도 되는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을 구분 지어 최대한의 예의를 지켜 행동하는 것이다. 남에게 책임져야 될 일을 만들지도 만들어야 할 이유도 없으니까.
나는 이미 가까운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 죄책감과 상처 받은 후유증으로 충분히 힘들기 때문에 잘 알지도 못하는 남에게 조차 상처를 주면서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상처 받고 싶지도 않은 건지 모르겠다.
내가 책임져야 할 사람은
가족만으로 이미 충분한 것이다.
남을 위해 설거지를 하면 화가 나지 않았을 테지만 가족을 위해 설거지를 할 때마다 화가 날 때가 있다. 엄마를 도와주겠다고 설거지를 하다 갑자기 짜증을 내는 나 때문에 엄마는 상처를 받는다. 설거지만 하면 집안일에 나 몰라라 했던 친오빠와의 과거가 떠오르는 것이다. 부모님과 떨어져 살았던 내가 일을 하고 집에 돌아와서 마주해야 했던 현실에 극도의 스트레스와 원망을 키우며 살았었다. 오빠가 먹은 걸 그대로 쌓아 뒀던 설거지 거리, 치워지지 않은 집안, 잔뜩 쌓인 빨랫감, 끊이질 않는 오빠의 뒤치다꺼리. 벌이지 않아도 될 사투를 벌이며 내가 왜 이런 희생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동생이라는,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희생을 해야 하는 이유를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남을 위해 상처를 치료해 주면 화가 나지 않지만, 가족을 위해 상처를 치료하면 화가 날 때가 있다. 남이 아프거나 다치면 얼마나 아프냐며 눈물을 흘려주고, 나서서 아픔을 치유해 주려 나서지만 정작 내 가족의 아픔에는 외면해 버린다. 그 순간에 아픔만 보는 게 아니라 과거에 가족이 내게 줬던 아픔을 나도 모르게 소환하게 된다. 그때 '나한테 이런 상처를 줬으면서 이런 거 가지고 꽤병이냐'는 식의 원망 섞인 마음이 피어오른다. 아파하는 가족을 보면서 내 마음이 아파 썩어 문드러 지면서도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가족이 밉기도 한 것이다. 남보다 못하다는 가족이라는 관계가 어쩔 때는 참으로 야속하기만 하다.
가족이 아파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가족에게 더 큰 아픔을 주기도 한다.
서로가 곁에 없을 때에도
아픔에 더 단단해지라고 그런 걸까.
어느 날 아빠가 해맑게 웃으시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엄마가 살이 꽉 찬 꽃게탕에 꽃게살을 보면서 아기같이 설레어하는 모습을 지긋이 바라봤다. 결혼한 친오빠가 집에 놀러 와서 회사에서 있었던 재밌는 얘기를 신나서 얘기하는 모습을 곁눈질로 바라봤다.
아.
아빠는 아빠의 부모님께 얼마나 소중했을까.
엄마는 엄마의 부모님께 얼마나 소중했을까.
오빠는 우리의 부모님께 얼마나 소중했을까.
돌아가신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에게 아빠, 엄마는 얼마나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사랑스러운 아이였을까. 나의 부모님은 할아버지 할머니를 사랑하면서도 미워했을까. 부모가 되었다고 무조건 희생해야 하고 사랑을 줘야 하는 게 아닐 텐데. 자식이 되었다고 부모의 사랑과 보살핌을 당연히 요구하며 부족함에 더 큰 부족함을 부르짓는 횡포를 부려도 되는 게 아닐텐데.
나의 사랑 받음이 당연하면
너의 사랑 받음도 당연한데
우리는 서로가 너무 소중해서
서로에게 소중해지려고
소중함을 잃어버린 건지 모른다
진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2021년 어버이날
올해는 카네이션을 직접 만들어서 드려보자고 생각했다. 금요일 아침, 5월의 녹음을 풍성하게 해 줄 단비를 뚫고 양재꽃시장으로 향했다. 어버이날 시즌에 흐린 하늘과 굵은 빗줄기가 더해져서 그런지, 한 달 만에 찾은 양재꽃시장은 평소보다 더 붐비고 분주하게 느껴졌다. 한편으로 마음은 분주하지 않았다. 화훼장식기능사 준비를 할 때 이곳에 왔던 마음과는 다르게 마음에 여유가 생긴 것이다. 내 맘대로 내가 원하는 꽃을 이것저것 사보는 것. 자유롭게.
꽃값은 여전히 비쌌다. 기능사 꽃 재료를 살 때 품질이 좋아 자주 갔던 곳에서 꽃말이 사랑인 핑크 카네이션 20송이(15,000), 샤넌 장미 10송(17,000), 그리고 조그마한 초록 잎에 아주 작은 흰꽃이 촘촘히 피어있는 냉이(10,000)를 구입했다. 이것저것 사서 예쁘게 꽃바구니를 만들어 보려 했지만 3가지만 구입. 2층으로 올라가 부자재 가게에서 토퍼와 바구니를 추가로 구입했다. 토퍼 하나는 love you , 다른 하나는 감사합니다. 바구니는 하나에 3,500원.
구글링 해보니 핑크빛 샤넌은 국산 장미다. 내가 지금까지 맡아본 장미 향 중에서 가장 향이 좋고 향이 강하다. 방 안에 놔뒀더니 방 안 전체가 섬유유연제로 빤 것처럼 장미향으로 꽉 찼었다. 꽃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잔향마저 오래가는 그런 꽃이다. 가시도 별로 없고, 줄기도 튼튼하고, 다듬기도 편해서 앞으로 내가 좋아할 장미다.
아직 배우지는 안았지만 유러피안 스타일로 자연스럽게 꽂아보려고 했는데, 내 손은 화훼장식기능사에 길들여저 있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아는 만큼만 할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5~6월에 흰색 꽃이 피는 냉이꽃은 꽃말이 '당신께 모든 것을 드립니다'이다. 3월 봄에는 냉이 순과 뿌리를 넣어 냉이 된장국을 끓여먹고, 5월에는 냉이가 피어낸 꽃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전한다.
냉이는 사랑이다.
누구에게나 단점이 있듯 냉이도 그렇다.(꽃을 선물하는 인간 기준의 단점이다. 냉이에게는 이것이 종족 보존을 위한 삶의 정수일지도.) 그것은 후드득 떨어지는 꽃잎(계란을 뒤집어 놓은 모양의 아주 작은 꽃잎). 살짝만 스쳐도 냉이에서 하얀 꽃잎 가루가 파마산 치즈가루처럼 떨어지는 것이다. 꽃바구니를 움직일 때마다 온천지가 하얘진다. 누구에게 선물을 줄 때, 냉이꽃 선택에 조금은 신중해져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냉이는 사랑이다.
5월 8일
내가 당신에게 꽃인 줄 알았더니
당신이 내게 오히려 꽃이었군요.
나태주 시인의 일력과 함께
동네 단골집에서 주문한 꽃앙금 케이크와 난생처음 만들어 본 밀푀유나베(퓨전 일식으로, '천 개의 잎사귀'라는 뜻의 프랑스어 밀푀유와 '냄비'라는 뜻의 일본어 나베의 합성어)그리고 카네이션 꽃바구니로 가족에게 좋은 사람이 되려 했던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