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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비 Oct 22. 2023

[07] 있어빌리티

엄마의 종교

'사건'에 대해 말할 때 아빠가 잘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엄마를 원인 제공자라고 비난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엄마의 고통에 완벽하게 동의할 수 없다. 만약 엄마가 기나긴 장고 끝에 이혼하기로 했다면, 나는 차라리 '엄마 그 동안 고생했어요' 위로했을 것이다. 엄마의 고통에는 일관성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엄마는 실컷 슬퍼하고 아빠에게 '나는 다 알고 있다'고 소리친 후에도 '나는 그래서 너에게 무언가를 원한다'는 요구를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이해가 안됐다. 왜지? 죽겠다고 말하더니 상대방이 제공한 빌미를 왜 잡아서 넉다운을 시키지 않는 거지? 왜 용서하려고 그렇게 혼자 애를 쓰는 거야. 상대방이 구하지도 않는데. 아빠 때문에 인생 망친 거 맞아? 아빠가 엄마 인생 잘못되게 만든 원흉 맞아? 


내가 이렇게까지 엄마가 이혼하길 바란 건 아니지만, 좋은 예들이 분명 있었다. 폭력적인 남편을 버리고 어린 딸과 함께 서울로 상경하신 엄마 지인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얼굴빛이 남달랐다. 내 인생은 내가 개척하고,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다치지 않도록 나는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런 얼굴. 한 사람의 여성으로써 그 분을 지지하고 이해하는 내 감정과, 비교해서 웬지 비겁해 보이는 우리 엄마의 포지셔닝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내 뇌의 인지부조화. 


희한하게 '사건'의 명백한 피해자는 엄마가 맞는데, 나는 우습게도 아빠가 아닌 엄마에게 실망했다. 아마도 엄마가 이번 기회에 인생을 바로잡을 뭔가를 할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에? 나의 엄마가 아니라, 자연인의 한사람으로써 자신의 인생을 나락에서 구해내고 새 삶을 살 것이라 생각해서?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경제적인 문제를 일단 뒤로 미룬다면.


왜냐면 엄마는 늘 뭔가를 읽고 쓰고 있었으니까.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사람은 세상과 자기 자신과 타인에 대해 알려고 하고, 자기 자신의 서사에 대해서 고민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책과 글에서 찾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내가 존경하고 자랑스러워했던 우리 엄마, 지성인으로써 엄마는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 건 건가요.


이혼은 커녕 다른 방으로 도망친 후 동의도 반대도 아닌 '침묵'을 선택한 엄마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것이 시위라면 무엇을 위한 시위이고, 엄마가 종국에 얻기를 원하는 건 무엇인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토록 모든 것에 진심인 사람이, 왜 이 문제에 대해서는 직면하는 것 같지가 않을까. 엄마가 결혼생활을 통해 구하고자 했던 것, 혹은 남아서 지키고자 하는 것은 더 이상 진심이 아닌 걸까. 엄마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뭘까. 그러면 안될 것 같지만 자꾸만 엄마의 옷장을 열어보고 저 깊은 곳에 숨겨둔 상자에 무엇이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엄마한테 듣는 잔소리 중 최악은 ‘있어 보여야 한다’. 아니 뭐든 있으면 있는 거지, 있어 보여야 된다니, 허세도 이런 허세가 없고 그야말로 없어 보이는 말. 늘 하는 말씀이라 그런 줄은 알았지만, 역시 글을 모아서 읽으면 그 사람이 그려진다. 엄마가 환갑기념으로 출판한 에세이집을 읽으며 당황했다. 엄마가 말을 할 때는 지나치게 솔직한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읽어보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 엄마 마음의 밑바닥은 다 본 것 같았는데, 글은 그저 태양빛이 반짝이는 수면만 노닐고 있었다. 웬지 모를 배신감. 아직 멀었구나, ‘어머 어머니 소녀 감성이시네요’ 라는 말이 온전한 칭찬인 줄 아는 걸까. 인생과 세상은 몰염치, 권모술수, 부조리, 욕망의 진흙탕인데 르포는 아니더라도 너무 고운 에세이를 읽을 때마다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망상가라고 비판해왔는데, 우리 엄마가 그런 사람이었다. 너무 힘든 얘기는 못본 척 하는.


엄마는 긍정성에 탐닉하는 사람이다. 美에 집착한다. 온갖 이쁘고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환상이 가득하다. 누군들 그렇지 않겠냐만 유난히 멋진 ‘가족’의 모습에는 아직도 미련이 많다. 나에게 별 감흥이 없었던 ‘윤미네 집’을 읽으며 울었다던 엄마. 나에게 이런 다정한 집을 만들어주지 못해 미안해하는 줄 알았는데, 이런 딸 사진 찍어주는 남편을 못 만난 본인은 왜 이리도 박복하냐고 눈물을 훔치길래 그래도 좀 짠해서 에이, 다 그래요, 라고 위로하던 참에 던진 마지막 말 '이 중에 한 명은 서울대 나왔다 안하드나.' 내 마음의 짠함이 확 가시지만 안멋진데 어떻게 멋져 보이기만 할 수 있겠어, 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다정한 가족을 늘 원했다던 엄마의 말과 달리, 아무리 더듬어봐도 내가 엄마 손을 잡고 걸은 기억이 없다. 항상 반듯하게 군인걸음으로 바쁘게 앞서가는 엄마의 등 뒤를 바라보며 동생 손을 꼭 쥐고 걸었던 기억뿐. 엄마의 품이라는 단어에 연상되는 추억도 없다. 엄마 목덜미의 냄새랄지, 엄마 배의 푹신함이랄지, 기억되는 감각은 없다. 특별한 이유가 있다기보다 엄마나 아빠 모두 본인들도 그런 ‘물고 빨림’의 애정공세를 받아본 적이 없는 데다가 무뚝뚝하기로는 따라갈 길 없는 영남 시골 사람들인지라 가족끼리는 서로 손만 잡아도 ‘와이카노’ 소리가 더 자연스러웠을 것이라 짐작한다. 


어린 나에게 필요했던 건 그저 집에 오면 안아주는 것, 내가 어떤지 살피는 눈길, 사랑한다는 말이었을텐데 엄마는 '좋은 엄마'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엄마가 엄마 자신을 위해 하고 있는 일들. 먹고 싶은 반찬을 묻기보다 나 이것까지 만들 수 있어 보여주는 요리들(물론 맛있었다), 엄마 취향의 패브릭 도시락 혹은 실내화 가방, 니가 이렇게 피아노를 치고 있으니까 너무 보기 좋다던 엄마의 칭찬. 


방에 가득한 엄마가 만든 퀼트와 자수 작품들을 보면 귀여운 것들이 대부분인데 웬지 한이 느껴진다. 그녀가 지우려고 했던 불안의 흔적들인 것만 같아서. 뭔가 하고 있지 않으면 내 인생은 잘못된 거야 중얼거리는 모습이 보여서. 사랑해서 해주는 게 아니라, 해주어야만 사랑받을 수 있다는 듯이. 내가 이렇게 너를 위해 열심히 해주는데, 너는 왜 나를 사랑하지 않니. 아름다운 가족을 위한 미쟝센. 


이렇게 엄마의 진심을 헤집어 보지만, 차마 비난할 수 없다. '너는 무지랭이 농부의 딸로 태어나지 않아서 모른다'던 엄마. 정말로 모든 것이 '있었다면' 엄마가 '있어빌리티'에 집착할 필요는 없었을텐데. 엄마가 내 손을 잡아주지 않았어도, 나를 자주 안아주지 않았어도, 엄마가 만들어준 많은 것들 덕분에 '있어보일 필요'를 별로 느끼지 못한 나는 엄마의 이런 휑한 마음을 온전히 이해해주지 못한다. 


서울대를 나오지 못해서 엄마의 '있어빌리티' 기준을 충족하진 못했지만, '국적은 바꿔도 학적은 못바꾼다'고 고3인 나를 달달 볶던 엄마였지만, 엄마는 도대체 왜 나를 낳은 거야, 투덜댄 적은 없다. 엄마에게 실제로 존재하는 '있음'을 실현할 기회는 자식이었을 거라서. 아마도 엄마는 누군가에게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나 보다. 나의 아버지가 누구든, 엄마가 그를 얼마나 사랑했든 상관없이, 나는 틀림없는 엄마의 자식이다. 나는 빈털터리 친정에서 도망쳐서 가지게 된 엄마의 온전한 소유물 1호였다. 내가 태어남과 동시에 엄마는 절대적으로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 


엄마에게 결혼을 하고 싶었는지 물어본 적은 없다. 다만 사랑, 연애, 결혼이 각각 별개의 사건들이 꿰면 하나의 큰 행복이 될 거라고 상상한 건 틀림없다. 살다 보면 좋아질지도 모른다는 주문을 외웠던 건 틀림없다. 엄마도 누군가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고 싶다고 소망했다는 점은 확신한다. 지금도 여전히 결혼과 육아는 한 여자가 누군가에게 중요한 사람이라는 걸 느끼게 해주는 가장 빠른 길이지 않을까. 


(8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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