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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비 Oct 22. 2023

[08] 첫날밤

얼떨결에 일어난 일

한 집에서 수년째 문자메세지로만 대화를 하던 엄빠가 드디어 말을 섞기 시작했다. 역시 가족은 (경제) 공동체라 이불 두 채에 각방을 쓰더라도 지붕은 하나를 이고 있는 관계. 오래된 부엌 싱크대에 곰팡이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며 우리 집에도 봄이 왔다.


아파트에서 태어나 아파트에서 죽을 줄 알았는데, 어느 날 할아버지가 시골로 멋들어진 한옥을 지어 이사를 가시며 아빠에게 당신 살던 30년된 2층 양옥집을 선심쓰듯 투척하시는 바람에 처음으로 단독주택에 살게 되었다. 늘 가장 좋은 것은 당신부터 가져야 직성이 풀리는 분이라 어쩔 수 없다는 건 알았지만, 마당이 있으면 개도 키울 수 있는 걸까 내심 기대하며 세기말 겨울 우리는 오랜만에 헌 집으로 이사를 했다.


와보니 할아버지가 사실 때와는 완전 다른 집이 되어 있었다. 잉여롭게 노닐던 잉어와 꼬마 분수대가 있던 작은 연못은 흙으로 메꿔져 있었고, 철철이 바뀌는 꽃들과 한 치의 삐져나옴조차 허락되지 않는 할아버지의 꼼꼼한 원예로 단정히 이발되었던 나무들이 사라졌다! 겨울이라 이리 마당이 앙상한가 했는데, 알고 보니 당신 보기 좋은 나무와 꽃들을 모조리 뽑아가신 것. 차마 못가져갔거나 가져가려다 만듯한 나무 쓰레기로 어수선한 마당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니 집구석이 망하면 이런 느낌이구나 싶었다. 족히 오미터는 되어 보이는 천장, 쌓인 먼지때문이라도 곧 떨어질 것 같은 샹들리에, 아버지 친구집에서도 본 적이 없던 스팀난방기, 걸을 때마다 발시린 건 둘째치고 삐걱거리는 마룻바닥, 집만 덩그러니 있지 바람을 전혀 막아주지 못하는 커다란 새시와 내 키만한 창문들. 켠 건지 헷갈리는 2층 계단의 어둡고 희미한 전구들.


다 뜯어 고쳐야 된다는 엄마와 최소한의 것만 고치며 살며 된다는 아빠에게 또 신나게 싸울 거리가 생겼다. 결국 다 뜯어고칠 돈이 없는 엄마는 입을 다물어야 했고, 아빠는 쾌적하게 살기엔 좀 구리지만 집을 나가기엔 살만한 정도만 수리하는 것으로 두 분이 ‘합의를 봤다.’ 늘 그렇듯 어쨌거나 아빠 돈으로 필요한 곳만 찔끔찔끔 바꾸고 새로 해넣고 그럭저럭 잘 살아왔는데, 당시 새로 산 아이보리색 세라믹 싱크대에 곰팡이가 피기 시작했다. 흔한 스탱도 아니고 작은 디귿자 부엌은 습기가 나갈 길이 마땅치 않아서였을까. 하나둘씩 점점이 시작된 곰팡이는 여름이 되며 점차 태풍처럼 강해지더니 까만 싱크대로 변해가고 있었다. 아직 아귀 힘이 좋은 우리 엄마의 걸레질에도 없어지지 않는 놈들이라면, 이건 틀렸다. 얼핏 보면 썩은 게 아닐까 싶을 때쯤 엄마는 싱크대의 사망을 선고했고 이제 몸빵 말고 현질을 할 때라고 결론을 냈다.


이왕이면.

모든 견적서는 이 한 마디마다 세 배씩 불어난다. 썩어 들어가는 건 싱크대만은 아니었다. 찬찬히 살펴보니 견적서에 들어가야 할 아이템들이 많았다. 이미 수명을 다한 가스레인지, 몇 번 해먹지도 못한 오븐, 내려앉기 직전인 식기 건조대 등등 생애 다시 안 올 기회를 놓칠세라 이 참에 눈에 거슬리던 모든 부엌을 통째로 환생시키려던 엄마는, 그래도 전업주부답게 현실감각을 잃지 않고 안바꾸면 죽을 것 같은 놈들만 견적서에 쑤셔넣어 쥐어짰고 단돈 육백이면 이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문제는 지금이 냉전시대라는 것. 자존심인지 인생인지 걸고 몇 년째 ‘대화를 안하니 싸울 일이 없어서 좋고 이것이 평화’라고 우기는 중이므로, 평시의 엄마라면 이 집이 내 집이냐 큰소리 치며 당당하게 돈을 내놓으라고 해도 시원찮을 판국에, 그깟 씽크대 때문에 모양빠지게 아빠에게 돈을 달라고 부탁할 수는 없었다. 결혼과 동시에 하던 선생질을 맞바꾼 엄마는 이럴 때 유용하게 쓸 비자금도 없었고, 위기에 척척 입금하는 잘난 아들딸도 없는 처지라 눈물을 머금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절대 혼자 고민하지 않으신다. 아무리 이 집이 아빠 명의라 하더라도 견적서와 입금액을 문자메세지로만 띡- 보낼 용기가 없었던 엄마는 ‘어떻게 하면 느이 아부지가 군말없이 돈을 줄 것 같으냐’며 밤마다 나에게 전화를 걸어 집주인을 상대로 한 치열한 전략시뮬레이션을 펼쳤다.


또 ‘문여사’다. 받을까 말까 고민하다 받은 수화기 너머 엄마 목소리는 흥에 넘친다. 돈이 들어왔단다. 역시 입금은 누구든 춤을 추게 한다. 오 웬열. 혼자 눈알을 굴리며 ‘이 부엌 나만 쓰냐’ 부들대던 엄마가 머쓱하게, 최근 틈틈이 전통적 가부장에서 가정적인 남자로 업그레이드된(왜 때문에 이제사) 아빠는 엄마 말을 듣자 마자 작은 한숨과 함께 ‘그럽시다’ 한 마디 보태며 다음 날 바로 입금을 해주셨다고 했다. 무려 천만원. 간절히 구하라, 더 많이 이루어질테니.


그리고 시작된 공사. 틈틈이 엄마가 보내주는 사진을 보니 부엌 찬장에서 나온 유물 같은 살림살이들을 전부 바닥에 늘어놓고 이재민처럼 살고 계신다. 짠하다. 가서 내가 몸으로 때워야 되는데 아무 도움도 안돼서 약간의 미안함도 있었지만, 아마도 십장 아재들에게 하나부터 열까지 신나게 지적질하며 엄마는 자아실현을 하고 계시겠거니 애써 생각했다. 드디어 짜잔. 반짝이는 싱크대와 엄청 세심하고 집요하게 골랐을 타일들을 보니 마음이 개운해졌다. 우와, 완전 새집됐네. 곧 놀러갈께요 엄마.


버젯이란 반드시 초과해야 정상이다. 돈이 남으면 다시 돌려줘야 할 것 같은 당신 마음의 양심을 위해, 엄마는 씽크대를 고치고 남은 돈을 다 써버리기로 작정했다. 집 안에 헌 물건이 넘쳐나는데 이 참에 또 뭘 바꿔볼까 하고 지형지물을 탐색하던 엄마의 레이더망에 걸린 건 원래 손님용으로 장만했던 2층방의 침대, 즉 지금 엄마의 새 안방. 


집에 손님은 늘 들끓지만 자고 가는 게스트는 자식 셋밖에 없으니 그 침대는 사실 '탈안방시대' 이전에도 종종 엄마의 침대가 된지 오래였고, 매트릭스는 마치 타이타닉처럼 중앙부터 장렬히 침몰하는 중이었다. 시장바닥에서 콩나물 삼천원은 시원하게 깎아도 이백만원짜리 소파는 어떻게 흥정해야 할지 몰라 쩔쩔매며 아무 거나 질러대던 엄마답게, 삼백만원짜리 침대를 곧바로 주문했다. 말로는 당장 오늘밤이라도 아빠를 영원히 저주하며 떠날 듯이 큰소리 치던 엄마의 침실엔, 그렇게 더블 침대가 묵직하게 들어앉았다.


낮에 새로 산 토퍼와 커버를 슥삭슥삭 씌우고 운동장만한 새 침대에 누울 생각에 설렜던 엄마는, 잠시 망설였다. 더 이상 한 식탁에서 마주보며 같이 먹어주지는 않지만 가장을 굶길 수는 없어서 끼니마다 아빠의 3첩 혼밥을 차려주던 엄마는 새 침대에 혼자 자기엔 양심이 간지러웠다. 그래도 삼십 년 넘게 한 침대를 썼던 룸메이트에 대한 쥐꼬리만큼 남은 의리였을까. 아니면 평생 남이 벌어온 돈으로 나와 너 그리고 우리의 삶을 꾸려가고 살아내던 사람이 마땅히 쩐주에게 보여야 할 매너라 생각했을까. 말없이 평소보다 천천히 설거지를 하던 엄마는 결국 식탁에서 물을 마시던 아빠에게 뜬금없이 양심고백을 해버렸다. 


"2층에 새로 침대 왔는데 오늘 한번 자 볼래요?"



(꿀꺽)



“그라지 머"


띠로리. 엄빠의 동침 소식이 이렇게 낯설 수가. 이 아래위층 롱디 커플이 밀린 수년치를 업데이트 하던 중 아빠가 엄마 손을 슬며시 잡았다 카더라며 킥킥대는 막내에겐 ‘뭐야, 엄마가 결국 졌네, 졌어.’ 한쪽 입꼬리를 한껏 올리며 빈정댔지만, 막내에겐 말하지 못한 내 마음 한 켠이 울컥했다. 내가 다시 해후한 것도 아닌데 왜 이러지. 역시 ‘라면 먹고 갈래요’는 60대에도 통하는 건가. 오래 살아야 별 꼴을 다 볼 수 있구나.


참고 살면서 도망도 못가는 엄마가 바보같아서 짜증이 났었다. 실은 나에게 아빠 대신 의지하려고 해서 나야말로 도망치고 싶었다. 언제나 냉혈한 같은 아빠에게 저렇게 털리면서 왜 이혼은 안하는 거야 답답해하며 자기 인생을 우선순위로 놓지 않은 엄마에게 존경심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잠시 잊고 있었다. 엄마는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는 걸. 결국 이번에도 엄마가 먼저 뭐가 되었든 결과를 단정짓지 않고 아빠에게 올리브 나뭇가지를, 다시 한 번 내밀었다. 유한한 인생과 모자란 시간이 잘잘못을 누그러뜨리고 다시 서로를 망각하듯 용서하기로 한걸까 생각하면 씁쓸하기도 하지만, 아니라고 부인할 수 없다. 그 동안 왜 그렇게 싸운 거야 싶은 허탈감도 금새 잊혀질 테니까.


사십 년을 같이 살며 많은 밤을 누워서 얘기하던 투머치토커들 버릇이 어디 갈까. 첫날밤, 그들은 어차피 잠도 안오는 밤에, 동이 틀 때까지 이야기꽃을 피웠다고 한다. 싱거운 사람들 같으니.


(9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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