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산은 아니었지만

by 김현주

‘그래, 임신이 그렇게 쉽게 되겠어?’ 마음 한구석에서 외쳤다.


남편은 아이 이야기가 나온 뒤로 임신을 적극적으로 밀어붙였다. 지금은 아이에 대한 생각이 없을지라도 나중에는 마음이 바뀔 수도 있다거나, 임신이라는게 시기를 정한다고 해서 딱 맞춰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남편의 말은 모두 틀린 말이 아니었다. ‘정말 나중에 후회할 일이 생기면 어쩌지?’라는 약간의 염려는 딩크로 살고 싶었던 내 마음을 많이 흔들었다. 남편은 갈팡질팡하는 내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남편은 ‘아이를 갖자’는 말보다 ‘시도해보자’는 표현을 썼다. 나는 그 ‘시도’라는 말에 마음이 조금 풀어졌다. ‘시도’라는 말은 결과보다는 과정의 단어였으므로, 그 시도가 바로 임신으로 연결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내 선택을 조금 더 연장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 같은 것이 있었다. 시도일뿐, 임신은 아닐 거야. 결국 우리는 처음으로 임신을 ‘시도’하게 됐다. ‘그래, 임신이 그렇게 쉽게 되겠어?’ 마음 한구석에서 외쳤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회사에서 처음으로 느껴본 어지럼증이었다. 순간적으로 시야가 흐려지고, 몸이 바닥으로 꺼지는 것 같은 혼미함이었다. 남편은 퇴근길에 임신테스트기를 사왔다. 테니스 레슨이 있던 저녁이었다. 테스트기에 선명하게 나타난 두 줄을 보며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떨떨한 기분이었다. 남편은 그날 테니스 레슨을 취소했다. 생각보다 빠른 소식에 당황스러웠지만 마음 한 켠에는, 그래도 노산은 아니네- 안도의 마음도 들었다. 그날 이후로 온갖 감정이 하루에도 몇 번씩 파도치듯 밀려왔다 쓸려 나갔다. 새 생명을 품었다는 사실, 내가 한때 꿈꾸던 미래에 가까워졌다는 사실에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기쁘지 않았다. 기쁘지 않았다고 해서 슬펐다거나, 절망스러웠다는 건 아니다. 우울한 것도, 막막한 것도, 후회하는 것도 아니었다. 기쁨과 기쁘지 않음 그 중간 어디쯤에서 길을 헤매듯 왔다 갔다 했다. 나는 내가 담당하던 일의 마감 기한과 출산 예정일을 따졌다. 무리 없이 막달까지 회사를 다닌다면 마무리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임신 사실을 회사에 언제, 어떻게 알려야 할지, 부담스러웠다. 신혼을 조금 더 즐기자고 피력해야 했을까, 결국 내가 동의한 결정임에도 나는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병원에서 아기의 심장 소리를 세 번째로 들었을 때까지 나는 대체로 그럼 감정상태였다.


안정기에 접어 들면서 주변에 임신 소식을 알렸다. 축하가 쏟아졌다. 그 축하에 누구보다 만족해하는 남편의 모습을 보며, 둘이 시작해 셋으로 가는 삶의 방향이 생각했던 것보다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했다. 계속 둘이 살았다면 경험하지 못했을 축하였다. 쏟아지는 축하 속에서 나는 나에서 임신부가 되는 과정을 받아들여야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내 이름보다 ‘산모님’으로 불릴 때가 많아졌고, ‘산모님’이라는 호칭은 결혼 준비를 할 때 들었던 ‘신부님’이랑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나는 그대로인데, 어쩐지 앞으로는 다른 사람이 되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뱃속의 아이가 커가며 태동을 느낄 때마다 내 안에 새로운 생명이 있다는 사실이 생경했다. 말로만 들어왔던 ‘신비로움’이라는 감정을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했다. 같이 근무 했던 부장님은 나의 임신 소식을 듣고 자신이 임신 했을 때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때였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내 안에 비어있던 공간이 꽉 채워지는 기분, 온 우주를 내 안에 품고 있다는 그 느낌이야 말로 인생에서 가장 값진 경험이었다고. 나는 그 ‘온 우주를 품고 있다’는 막연한 말을 태동을 느낄 때마다 떠올렸다. 매일 뱃속에서 조금씩 커지고 있는 아이를 상상하며 아이가 커지는 만큼 내 안에서 엄마의 자리도 함께 커지고 있음을 느꼈다. 비혼을 생각했지만 끝내 결혼을 결심한 것처럼, 딩크를 생각했지만 아이를 갖기로 결정한 것도 결국 잘한 선택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나는 뱃속의 아기가 커가면서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종류의 행복을 느꼈다. 지금이 아니었으면 아이를 갖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고, 미루지 않기를 잘했다고 나를 다독였다. 막달에 가까워질수록 나는 살면서 느껴보지 못한 행복함, 충만함 같은 감정들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뱃속의 아이를 만나면 이 감정은 배가 되겠지, 언제까지나 이렇게 아늑한 날들이 이어질거라 생각했다.


마침내 행복의 터널을 지나 아이가 태어났다. 그리고 아늑한 날은 짧았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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