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날아온 글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날아 Oct 15. 2024

물살이 밥창고와 사랑 존

<날아온 글> 두번째

*날개집엔 손 글씨 존이 있다. 정확하게는 편지 존.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받은 손 편지를 붙여놓은 공간인데, 어디냐면, 냉장고다. 나는 매일 물이나 간식을 꺼낼 때마다 편지들을 보게 된다. 읽을 때도 있지만 그저 보고 있을 때가 더 많다. 손 글씨가 그림처럼 느껴져서다. 나는 처음 편지를 받고 읽을 때, 발신자의 마음을 상상하고 그 마음을 이미지화해서 기억하는데, 그래서 평소에는 내용을 읽지 않고 보는 것만으로 충만하다. 그리고 그 충만함이 나에게 위안을 준다. 물론 내 안의 결핍이 심해지면 모든 편지를 정독한다. 그러고 나면 마음이 한결 좋아진다. 사실 이 모든 것은 조금 계산된 것이다. 편지 존은 과거의 날아가 앞으로 살아갈 날아에게 힘이 되라고 조성해 놓은 곳이기 때문이다. 소중한 마음들을 까먹지 말고 잘살아 보자는 마음으로 눈에 자주 띄는 곳에 전시해 두었다. 그렇게 선정된 곳이 잘 먹으며 살아보려고 마련한 냉장고 위였다. 이 냉장고의 이름은 ‘물살이 밥창고’다.


물살이 밥창고는 커다랗고 예쁘다. 모부 희와 옥에게 독립 선물로 당당히 요청한 비싼 물건이다. 나의 식사 습관에 영향 미친 희옥에게, 나만큼이나 내가 잘 살았으면 좋을 희옥에게 용기 내 얻은 금전적 사랑이었다. 그런 방식으로 응원받고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독립하며 가장 자신 없던 게 식사를 챙기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먹는 게 하염없이 귀찮고, 미루고 미루다가 대게는 별로 먹고 싶지 않은 것으로 배고픔을 대충 뭉개버리곤 했다. 그런데 그렇게 사니까 몸이 아프고 마음도 가난해졌다. 그 때문에 스스로 살뜰히 식사를 챙기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어렴풋이 바라게 되었다. 자주 실패하더라도 그렇게 하는 편이 잘 사는 것이라고 여겨지니까.


그래서, 물살이 밥창고 덕에 바라던 대로 살고 있냐고 묻는다면…. 노력 중이라고 얼버무리고 싶다. 식재료를 관리하고 요리하는 것은 별세계 행위였다. 그런 줄은 알았지만, 야채가 이렇게 빨리 짓무르는 줄 몰랐다. 곰팡이는 아차 하면 피어있고, 장 본 것의 전부를 먹어 없애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내가 시간을 다루는 능력이 생긴다면, 과거나 미래로 갈 게 아니라 식재료들의 시간만 제발 멈춰두고 싶다는 엉뚱한(진심이 담긴) 생각도 했다.


그리하여 혼자 사는 일은 셀프 돌봄을 끊임없이 타협하는 일이기도 했다. 오늘은 굶을래. 아니, 조금이라도 챙겨 먹자. 청소 귀찮아. 아니, 깨끗한 날개집에서 또 뭘 하고 싶게 될 줄 알고. 처음 날개집을 계약한 날을 기억해. 날개집을 얻기 위해 대출받느라 운전대 끌어안고 흘린 눈물을 떠올려…. 이런 식으로 결핍 날아와 충만 날아가 끊임없이 대립하는 나날들. 이 둘을 위해 날개집 가장 날아는 돈을 벌어와 월세를 내고 가끔 청소하고 장도 봐오고 물살이 밥창고를 어루만지며 편지 존을 서성거리는 날이 많아졌다. 편지들에 셀프 돌봄을 일정 의탁하고 있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이 지쳐서 셀프 돌봄을 뭉개려다가도 편지들이 다정하고 따스하게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어떻겠냐고 하는 것 같아 자주 마음을 새롭게 먹고 있다. 이렇게 잘 챙겨 먹기도 하고 새로운 마음도 자주 먹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물살이 밥창고 살갗에 편지 존을 조성해 놓은 갸륵한 계략에 기대어 여러 날을 살고 있다. 편지들의 발신자 모두가 입과 마음을 모아 잘 지내라고, 지내자고, 사랑한다고 써주었기 때문이다. 그래, 얘들아. 나 잘살아 볼게. 너희도 잘 지내고 있는 거지? 오늘도 사랑해!


앞으로 날개집의 편지 존을 사랑 존 이라고 불러야겠다.




*날아가 파주에 새롭게 얻은 집의 이름




메일리에서 연재중인 <날아온 글>의 두번째 글을 브런치에도 공유해요. 뉴스레터를 구독하시면 하루 일찍 글을 만나보실 수 있어요. 메일리 링크를 남겨둘게요. 

<날아온 글>

매거진의 이전글 날아 왔어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