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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아 Nov 01. 2024

우유를 삼키고 소화하는 과정

<날아온 글> 네번째

※ 이번 글에는 반려동물의 죽음과 사후 과정 묘사가 등장합니다. 감상에 주의해 주세요.

손잡는 고양이와 구름


“개랑 살고 싶어요. 제가 그래도 될까요?”

함께 글을 쓰고 나눈 이들과 동그랗게 모여 앉은 자리에서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것에 대해 타로점을 보았다. 결과는 보류. 시기가 적절하지 않다고 했다. 왜 동물을 키우려고 하냐는 질문에 명료하게 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입을 뗐다. “최근 보호소 게시글에서 본 아이가 자꾸 눈에 밟혀요. 같이 살고 싶고…. 그런데 제가 그래도 되는 사람인지 잘 모르겠고요….” 막상 독립하니까 외로워서 살 붙일 생명체가 필요하다는 얄팍한 욕구 아니냐고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 아무도 묻지 않은 질문에 해명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되어서 대답이 되지 못하는 말만 늘어놓다가 문장을 매듭짓지 못하고 말하기를 멈췄다. 그날 밤 말이 되지 못하고 목에서 턱 걸리고 말았던 마음에 관해 쓰고 싶다. 스스로에게 해명을 바라는 마음으로. 오래 묵혀온 마음을 마주하고 넘어가야 새로운 마음을 부드럽게 먹을 수 있을 것이라 직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용기를 내야 한다. 동물을 키우고 싶어 하는 마음 앞에서 스스로를 혐오하는 나. 그리고 그걸 덜 하고 싶은 나. 내가 그래도 되는 걸까.

*

기르던 고양이가 죽었다. 나는 어리고 저능하고 가난한 주인이었다. 나는 정신이 아팠고 고양이는 몸이 아팠다. 나는 죽을까 하다 말았고 고양이는 죽었다. 동물병원에서 고양이가 곧 죽을 거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너무 미안해서 많이 울었다. 아주 좁은 자취방에서 내 고양이가 죽었다. 그날 얘가 곧 죽을 것 같아서 아무것도 안 하고 지켜봤다. 고양이는 죽기 전에 나에게 아주 많이 화를 내다가 죽었다(고 느꼈다). 나랑 사는 내내 온순하던 애가 동공을 확장하고 발톱을 세우며 헛발질과 하악질을 했다. 몸 어딘가가 아파 죽겠다고 니가 좀 어떻게 해보라고 나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다.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걔는 화내면서 울고 나는 미안하고 서러워서 울었다. 고양이가 죽자, 걔가 좋아하던 겨울 담요에 잘 감싸서 산에 묻어주었다. 생전 따뜻하고 부드러운 몸이었던 애가 죽자마자 아주 차갑고 딱딱한 돌 같아졌다. 너무 차가웠다. 너무 차가워서 ‘춥지. 춥지….’ 하면서 더 꼭 끌어안았 다. 한 손엔 커다랗고 무거운 삽을 들고 다른 손엔 죽은 고양이를 안고 낮은 산을 올랐다. 얘가 죽은 걸 매 순간 부정하고 싶은데 너무 차가워서 죽었다는 걸 매 순간 수긍해야 했다. 낙엽이 쌓인 땅에 고양이를 내려놓고 울면서 땅을 팠다. 충분히 깊게 못 팠다. 힘에 부쳤다. 정신병자는 이런 것도 야무지게 못한다. 끝까지 어설프고 무능하고 한심한 주인. 우유야. 너 말고 내가 죽었어야 했는데. 그때는 슬퍼하는 것도 죄스러워서 너를 꿀꺽 삼켜버렸어.

7년 정도가 지난 것 같다. 겨우 7년 같기도, 벌써 7년 같기도 한데 시간의 경과를 정확히 모르고 흐리게 가늠하는 이유는 우유가 죽고 땅에 묻은 뒤에 그날을 기록해 두지 않아서다. 몇 달 동안 혼자 우유가 죽은 하루 속에 살았던 것 같다. 모든 걸 기억하지만, 우유가 몇 월 며칠 몇 시에 죽었는지는 모른다. 모르다니. 그렇게 사랑하던 고양이의 죽은 날도 정확히 모르다니. 나는 정말 쓰레기 같은 주인이네. 우연히 고양이를 볼 때마다 날카로운 죄책감이 마음을 쑤셔대서 한동안 고양이를 멀리했다. 어쩌다 봐버린 예쁜 남의 집 고양이 사진이 귀여우면, 귀여워하는 스스로가 잔뜩 역해져서 마음이 더부룩했다. 우유를 그렇게 보내놓고 다른 고양이를 예뻐하면 안 되지. 네가 양심이 있으면 그래선 안 되지. 왜 안 되냐면….

*

그러니까 그날 아마도 내가 하고 싶었을 말은,

요즘 또 동물이랑 살고 싶어요. 사랑을 주고 돌보는 생활을 시도하고 싶어요. 그치만 아직도 저는 동물을 키우고 싶어 하는 스스로가 용납이 안 되고 혐오스러워요. 슬픔과 고통을 여전히 소화하는 중인가 봐요. 그 좁은 자취방에서 우유를 죽게 한 내가 수치스럽고 역겨워요. 동시에 날개집에서 잘 살고 싶어 하는 제가 애틋해요. 제 친구들이 이 마음도 사랑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라고 말해줬거든요. 네 안에 있는 사랑을 주고 싶은 마음이라고. 큰 사랑 안에 자리하고 싶은 마음이라고요. 그래서 동물을 키우고 싶어 하는 제 마음을 끌어안고 싶어요. 이제 그만 용서하고 싶어요.

그런데 사실 저 아직 그런 용기 못 내요. 동물 키우기 시작하는 것도 차마 못 할 거 알아요. 그래도 궁금했나 봐요. 그래서 점으로 보고 싶었나 봐요. 언젠가 그런 날이 올까요? 왔으면 좋겠어요. 올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 안녕하세요, 날아입니다! 오늘도 레터를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이 글을 쓰는 동안 혼란스럽고 무거웠던 마음을 아주 조금은 끌어안을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제 소중한 투명 고양이 우유를 글로 쓰며 만날 수 있어 좋았어요. 그리고 함께 나누고 싶은 질문도 떠올랐어요. ‘책임’이라는 건 뭘까?, ‘좋은 주인’이라는 건 뭘까?라는 질문들이에요. 나눠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댓글로 전해주세요. 다음 주에 새로운 글로 찾아올게요!


메일리에서 연재중인 <날아온 글>의 네 번째 글을 브런치에도 공유해요. 뉴스레터를 구독하시면 하루 일찍 글을 만나보실 수 있어요. 메일리 링크를 남겨둘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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