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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육아왕

친정 아빠의 재발견

by 날랩

우리 아빠는 육아 왕이다.


나는 이 문장처럼 어색한 문장을 본 적이 없다.


내가 지난 38년간 알고 지낸, 우리 아빠가 육아왕이라니.


a.k.a’ 밥통 대왕’으로 불리는 우리 집 가장께 오서는 육아는 물론 가사와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 60년대생 한국 가장 그 자체란 말이다.


조금 더 친절하게 설명을 해보자면, 우리 아빠는 내가 태어난 88년도에 사기업에 입사해서 30년을 넘게 한 회사를 다니셨고 코로나가 한창이던 때 정년퇴직을 하셨다.


가장으로서 늘 바빴던 아빠는 스케줄 근무자였고, 연휴에도 잘 계시지 않았다.


집에도 잘 없는 아빠가 집안일을 하는 것을 보는 일은 당연하게도 없었다. 집에선 그저 텔레비전 앞에서 리모컨을 움직이거나 주무시는 모습이 전부였다.


그런 아빠에게 ‘시간’이 생겼다.


퇴직 후에 아빠는 넘치는 시간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방황했다. 꽤 오랜 시간.


아빠는 늘 4시 40분 첫 차를 타고 출근을 했었다.


습관처럼 까만 새벽에 깨어나도 갈 곳이 없는 아빠는 늘어난 시간을 어찌해야 할지 모른 채 자주 멍- 했다.


아빠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생산적’인 일이 불가능해지자 아빠는 천덕꾸러기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텔레비전 앞의 본인이, 피곤해 자는 당신의 모습이 왜인지 나태해 보이고 답답해 보였다.


그전에는 당연했던 가사에 서툰 모습도. 괜히 뻘쭘해졌다.


아빠는 청소를 해보기도 하고 반찬을 내놓기도 했다.


서툴고 때론 답답했지만 그래도 그 모습이 못내 기특하고도 안쓰러웠다.


그렇게 최소한의 가사를 돕는 것만으로도 기특하고 안쓰러워 보이던 아빠가, 새로운 타이틀을 얻은 것이다.


다시 한번 어색한 ‘육아왕’


처음엔 아이를 안지도 못했던 아빠였다.


뒤늦은 황혼 육아에 힘들 엄마를 위해 아빠는 젖병 소독기에 물을 채우는 일을 겨우 해내며 본인의 쓸모를 찾았다. 하지만 물 채우는 일은 금방 끝나버렸다.


아빠는 곧장 집으로 돌아갔고, 며칠에 한 번씩 우리 집에 오는 식이었다.


(엄마는 주중에 매일 우리 집에 와주신다)


그런데 우리 딸이 어느 순간부터 ‘할비 바라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할아버지만 오면 눈을 못 떼고, 꺄르르 웃으며 다가가는 아가 덕분에 아빠는 강제적으로 육아에 참여하게 됐다.


그 덕에 엄마도 훨씬 수월해졌다. 아빠와 놀 때엔 아기가 아무도 필요 없는 상태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처음엔 아기와 대화하는 것 자체가 어색하고 쑥스러워하던 아빠도 이제는 제법 ‘영구’ 같은(너무 옛스러운 비유지만, 그것만 한 비유가 없다. 아빠는 영구다(?)) 혀 짧은 소리를 내면서 재잘재잘 수다를 떠신다.


“우리 서현이 이 책이 보고 싶었어요?”


“하비가 한 번 읽어줄까요?”


“오구 잘해쪄요~”


난생처음 보는 우리 아빠의 영구 목소리. 아빠의 해맑은 웃음. 그리고 아빠의 재능.


아빠는 육아에 소질이 있었다.


최근에 읽게 된 육아서에 보면 ‘아이에게는 탐험할 시간, 지루해할 시간이 필요하다’ ‘아이 앞에선 손은 천천히 사용하고 말은 생략하는 것이 좋다’라고 되어있는 데 그게 바로 우리 아빠의 육아법이다.


양육자라기보다는 예능인에 가까운 나와 엄마의 육아와는 확실히 달랐다.


우린 주로 아이 앞에서 재롱을 떨고 아이의 혼을 쏙 - 빼놓고는 아이보다 먼저 지치기 바쁘다.


그래놓고 이렇게 ‘애를 써서’ 봐주는데 왜 이렇게 할아버지만 좋아할까 생각했었는데, 아빠의 육아가 옳았던 것이다.


아빠는 아이가 하는 걸 뒤에서 봐주고 아이가 리액션을 요구할 때 거기에 응해준다.


아이가 넘어질 것 같을 때엔 개입해서 안전히 보호해 준다. 그 외에는 아이가 하는 대로 그저 지켜 봐준다.


별 거 아닌 것 같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것 같지만 아니었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존경이 피어오르는 지루하고 긴- 과정이다.


그리고 너무도 낯선 아빠의 모습이다.


그러니까 내가 어릴 적에 보기 힘들 만큼 바빴던 우리 아빠는 오랜 시간 내내 아기를 지켜봐 줄 시간이 생긴 것이다.


조급해하지 않고 서두르지 않고 아이의 속도대로 기다려 줄 여유가 생긴 것이다.


나처럼 쓸데없는 불안에, 괜한 조급함에 집중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눈앞에 손녀딸에게 오롯이 모든 에너지를 쏟고 있었다.


그 좋아하던 티브이를 볼 생각도 하지 않고 휴대폰 한 번을 쳐다보는 법 없이.


아이가 꺼낸 책을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넘기도록 그저 책받침이 되어주고 독서대가 되어준다.


아빠는 퇴직 후 잠시 잃었던 본인의 ‘효용’을 되찾았다.


그리고 넘쳐나는 시간을 자산 삼아 손녀를 위해 쏟게 되었다.


아빠도 빛을 찾고 아기도 행복해하는 그 모습이 너무 고맙고 감사하다.


‘아빠는 나한테 관심도 없었으면서 왜 참견이냐’고 쏘아붙였던 사춘기 시절의 못남을, 아빠의 서투름을 지적하기 바빴던 나의 불효를 ‘ 내 딸’이 대신 갚아주고 있는 요즘이다.


우리 딸은 퇴직 후 아빠의 인생 2막에 육아왕’ 타이틀을 얻게 해 주었다.


그리고 늘 바쁘고 멋졌던 우리 아빠를 다시 우러러보게 해 주었다.


내 딸이 인정한 일순위. 나보다 어쩌면 우리 아빠를 더 좋아함으로써 내가 더 이상 우리 아빠를 서툴다고 무시하고 만만하게 굴지 못하게, 권위를 주어주었다.


그래서 고맙다.


내 딸에게도. 우리 아빠에게도.


그러니, 내 딸이 나보다 아빠를 좋아하더라도 인정할 수밖에.


육아왕의 타이틀은 우리 아빠에게 양보해야겠다. 고맙고, 존경합니다. 우리 집 육아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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