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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디 Oct 27. 2019

프로 혼삶러와 프로 이직러

습관성 퇴사와 습관성 출국의 반복



'나 혼자 산다' 매체의 힘이 이리 무섭다.


혼삶의 시그니쳐와도 같은 ‘나 혼자 산다’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유행을 하고 혼술을 주제로 한 드라마도 인기리에 방영을 하며 1인 가구용 생활용품은 물론이거니와 이제는 1인을 위한 소형 스튜디오 원룸까지 나타난 것을 보면 상전벽해,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옛말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내가 첫 혼삶을 시작한, 엄밀히 말하자면 첫 혼행을 시작한 시기가 정확히 딱 10년 전 이 맘 때였는데 그때는 혼자, 그것도 '여자 혼자서' 여행을 다닌다는 것이 보편적이지 않을 때라(부모님껜 혼자 여행의 사실을 최근까지 숨겨왔다.) 혼자서 배낭을 메고 여행을 다니는 나를 주변 사람들은 아주 신기하게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혼행과 혼삶을 병행하게 된 9할의 원인은 바로 ‘환경’에 있었다.


 나는 아주 평범하게 공부를 못했고 대학도 그럭저럭 성적에 맞춰서 지방의 작은 소도시 국립대학으로 진학을 했다. 이 학교를 선택한 이유는 학비가 쌌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집에서는 통학을 할 수 없는 거리였기 때문에 반드시 기숙사에 들어가거나 자취를 해야만 하는 조건 때문이었다. 부모의 그늘을 빨리 벗어나 고팠던, 지금 생각해보면 어리석고 또 어리석은 나의 미숙했던 반항이 혼삶을 시작하는데 아주 결정적인 한방이 되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아주 신기하게도 부모의 품에서 벗어나고파, 그리고 성적에 맞춰 대충 들어간 별로 알아주지도 않는 지방 3류 국립대학에서의 생활이 이상하게도 재미가 있었다. 더 정확하게는 교내나 교외에서 주최하는 각종 대외활동이 참 좋았다. 지금이야 스펙 쌓기의 일환으로 각종 자원봉사, 여러 해외연수 프로그램이 즐비하게 넘쳐나지만 내가 대학을 다닐 때는 스펙이란 단어도 생소했고 본인이 발품을 팔아 정보를 찾지 않으면 안 되는 구조였기에, 나는 학과 내 활동보다는 학과 외 친구들과 교내에서 열리는 각종 행사들에 아주 열심히 참여했던 기억이 난다. 내 운명은 그때 바뀌게 되었다. 우연히 참가했던 일본 자매대학의 단기연수를 발판 삼아 교환 유학이라는 기회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나의 혼삶은 이때부터 시작이 됐다. 일본의 서쪽에 위치한, 산으로 둘러싸인 조용한 시골 캠퍼스의 국제 기숙사 1인실. 나는 이 기숙사 1인실을 참 좋아했는데 물론 아주 단순하게 월세가 싸서 좋은 이유도 있었지만, 캠퍼스 정문을 똑바로 가로질러 보이는 첫 번째 신호등을 우회전하면 닿을 수 있었던 시내 중고 마트에서 단돈 5000엔에 구매한 조금 낡은 고철 자전거를 타고 학교 후문에서 10여분 정도 내달리면 아니 이 작은 시골 동네에 이런 곳이 있었었나 싶은 수려한 풍경의 절들이 꽤 많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나름 소박하게 혼삶을 시작하면서 소박하게 나만의 공간을 즐기는 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볕이 드리우면 이불을 내다 널거나 스타벅스 파트너였던 시절 저렴한 가격으로 산 프레스 머신에 커피를 내려 마신다거나 하는, 지금까지도 스스로 좋은 습관이라고 생각하는 일련의 ‘혼삶 액션 리스트’는 캐나다와 일본 유학시절 쌓인 좋은 삶의 누적된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혼자 산다는 것이 얼핏 보면 외롭고 단조롭고 무료할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나 같은 경우 대단한 ‘깔끔러’가 아닌 것에 비해 빨래와 청소만으로도 주말 하루가 훌쩍 가고 좋아하는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보는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 안타까울 지경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혼삶은 결코 한가하지 않다.






'제3자'의 시선


 사실 나는 내가 정말 대단한 스펙을 가지고 있다거나 엄청난 노력파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특히 공부머리, 시험 머리가 없어서 자격증 같은 것도 없다. 수능은 망쳤고 재수는 못했고 대학 공부는 요령으로 했다. 하지만 대학 생활 통해 남들보다 조금 빨리 디테일하게 깨달은 점이 몇 가지 있다. 일단 나는 스스로 뭔가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큰 망설임이나 고민 없이 먼저 하고 본다. 그게 싫증 나고 오래 지속되지 않더라도 나를 질책하거나 야속해하지 않는다. 그냥 해보면 깨닫게 되는 것이다. '아 내가 해보고 싶었던 이것은 사실 이런 것이었구나.' 그럼 생각보다 그것에 대해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생기고 나와 맞지 않다고 깨달았다면 종국에는 미련 없이 깔끔하게 포기를 하고 또 다른 나의 강점을 찾아 여행을 시작하게 된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이런 나의 강점을 찾는 여행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잘 안되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래도 나이와 직업, 그 외 많이 얽매이는 부분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제어하는 시스템이 깊숙이 뿌리 박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 적이 있었는데, 이게 좋다 나쁘다를 말하고 싶은 건 아니다. 다만 조금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본의 아니게 이러한 현상을 보다 객관적으로 '밖'에서 보는 기회를 많이 가졌다. 이야기를 듣고 함께 공감하고 느끼는 것까지는 다른 또래들과 같았지만 그 이후에 대처하는 방식이 달랐던 것이다.

'아 그렇구나, 하지만 나는 이렇게 해야지.'

'저 사람은 저 사람.', '나는 나.'


 그랬다. 나는 서울이 싫고 타이페이가 좋았다기보다는 서울에서 일하는 직장 생활보다는 타이페이에서 하는 직장 생활이 더 맞았기 때문이고, '일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생각의 방식이 예전의 나와 많이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 엄청 느렸지만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 사람인지 우리 회사와 잘 맞는 인재인지 2-3시간에 걸쳐서 인터뷰를 보는 회사의 시스템이 좋았고, 이것이 반드시 옳다는 나의 흑백적인 사고방식에 충격을 주는 이들의 다른 문화가 좋았고, 끊임없이 충돌하는 다른 문화와 의견 속에서 스스로 다름을 깨닫고 이를 받아들이는 끊임없는 정서 훈련이 좋았다. 물론 도태되면 어쩌나? 이렇게 대충대충 살아도 되나? 고민하는 시기가 분명히 있었지만, 우리가 정의하고 이렇다고 생각하는 '옳음'과 '바름'이 반드시 이 나라에도 적용이 되는 것은 아니니까. 좀 더 대범하고 호방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아직도 서울의 궁궐이나 오래된 가옥, 성벽이 너무너무 좋고 두말하면 입이 아픈 우리나라 먹거리가 사무치게 그리우며 주말이면 열리는 각종 페스티벌, 여러 가지 행사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내가 느끼지 못했던 고국의 많은 부분을 경험하고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능하다면 좋은 사람을 만나서 소박한 가정을 꾸리고 싶기도 하고, 웬만하면 프리랜서로 잘 전향해서 장소에 구애받지 않으면서 내 능력을 힘껏 발휘해보고 싶기도 하다. 그렇지만 지금은 내가 있는 이곳에서 내가 이뤄낼 수 있는 가능한 루트로 하루하루 열심히 밥벌이를 하고, 내 존재의 가치와 내가 내 인생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계속해서 정립 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에 선택한 대만, 타이페이에서의 삶은 단단하고 두렵지 않고 불안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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