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사에 May 19. 2021

유빈

빛을 지닌 그대

2021.04.18

사진의 모델이 되어준 유빈과 처음 만난 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됐는데,

"제가 열이 받더라고요."

라는 말이 뇌리에 꽂혀 지워지지 않았다. 그녀는 나의 두 학번 후배로, 연기 전공으로 학교에 입학해서 연출을 하게 됐다고 했다. 연기하면서 열 받는 자신을 발견했다고. 여기서 열이 받는다는 것은 화가 난다는 표현이기도 하지만 단순히 그런 것만 담은 표현은 아니었으리라 생각한다.


나도 연출하면서 열 받는 일이 너무 많았는데, 그 당시 나는 스스로가 열 받을 만한 상황에 있다고조차 인지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녀의 말 한마디에 그 억울한 시간들이 열 받아서 그런 거였구나 싶었다.


 싫은 것을 싫다고 말할 줄 아는 그녀, 영화를 계속하겠다고 말하는 그녀. 스스로의 감정을 읽을 줄 아는 유빈이 신기했다. 나는 그토록 이야기를 계속하고 싶어 하면서도 계속하겠다는 말을 졸업하고서 한 번도 꺼내본 적이 없었다. 같은 것을 느끼면서도 그에 대한 반응은 확연히 다른 유빈을 보면서 왠지 모르게 위로받았다.


그림자가 만드는 풍경

 그 후, 사진 촬영을 잘 마치고 유빈과 다시 만났다. 서로 어떤 영화를 만들었는지 묻다가 내 영화를 설명해줬다. 찍다가 죽을 뻔 한, 죽을 용기가 없어 종말을 바라는 여자가 등장하는 이야기. 유빈이는 가만히 듣다가 제목을 물어봤고 내가 찍은 것인지 몰랐지만 그 영화를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차분한 그녀가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로 열심히 열심히 그 영화를 어떻게, 왜 기억하는지 이야기해주는 것을 듣고 있는데  나도 나 나름대로 벙쪄서

"그게 선배님이셨어요?"
"ㅇ..ㅓ.. 그게 나였어..ㅎㅎㅎ...ㅎ"

라는 대답밖에 해줄 수가 없었다.

그 영화의 끝에, 내 방 밖으로 보이는 야경에 크레딧을 올렸다. 세상에 나 이외에도 누군가 존재한다는 것이 위로가 되면서도 지독히도 외롭다.
 누군가에게 진심을 담은 "잘 봤어요."라는 말을 한마디만 들을 수 있었어도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시절 일기의 이곳저곳에 등장하는 구절이다. 유빈은 나에게 그 영화를 찍은 선배가 누군지 알게 된다면, 영화 잘 봤다는 한마디를 꼭 전해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헤어지는 길, 유빈은 나에게 자부심을 가지라고 말했다. 외장하드에 묻어버렸던 그 영화가 이젠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내게 기억될 것이다.


 그 영화를 찍을 때, 시나리오를 가지고 크리틱을 받으면 받는 족족 이런 걸 왜 찍냐는 이야기를 들었다. '도대체 이게 뭔..'이라고 짧게 코멘트를 받은 적도 있다. 담당교수는 영혼 없이, 하지만 한심하다는 듯한 ‘ㅎ...’로 일관했다. 너밖에 영화 찍은 애가 없어서 그냥 네가 영화제에 올라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할아버지가 암 수술을 마치시자 아빠도 같은 병에 걸렸다고 했다. 나는 다낭성 난소 증후군에 걸렸지만 그때는 자각하지 못해 병을 키우고 있었다. 지독히도 외로웠다. 그 모든 것에 허덕이면서도 나는 갈 길을 쭉 갔다. 멈추지 않았다. 어차피 할 걸 유빈의 말대로 자부심을 좀 가졌다면 어땠을까.

블로그의 비공개 글을 뒤적이면서 그 시절 이 글을 적었을 내 표정을 상상해본다. 지금과는 너무 다른 나. 내가 지켜낸 나.


 나는 통폐합 후 아무도 영화를 찍지 않는 시절에 영화를 찍겠다고 나섰다. 아는 사람들은 다 휴학을 해 지방에 내려가 있었고 친구들은 모조리 전과를 하거나 내 곁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울면서 정말 열심히 영화를 찍었다. 그리고 그 열심이 티가 나서 창피했다. 유빈이는 이상하게도 열심히 하지 않는 것이 Ganzi라고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세종대왕님 죄송해요) 생각하는 사람들 속에서 자기는 열심히 바보가 되었다고 했다. 아무도 발표하지 않는 수업에 나서서 생각을 발표하고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나 또한 지독히도 그런 우리 과의 분위기가 싫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 등록금)


우리는 열심히 해서 잘 되지 못하는 결과에 상처 받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단편이라는 것이 대개 잘 되기 힘든 것이기에. 그래서 열심히 하는 것은 바보 같기에, 그리고 안쓰럽기에


유빈과 찍은 사진으로 전시를 준비하는 지금, 며칠 전 엄마가 나에게 카페에서 물었다.

"그래서 너는 전시를 왜 하니?"
"글쎄, 공모가 됐으니까 하지."
"너를 위해서 하는 줄 아나 봐. 오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는 생각을 해야지. 누가 올지 모른다 해도."
엄마는 사진에서 사용한 달항아리를 갤러리에 가져다 놓자고 했다. 나는 누가 올지도 모르는데 내가 자리를 비웠을 때 그게 깨지면 어쩌냐고 물었다.
조금은 특이한 액자에 사진을 넣고 싶다는 말을 꺼내면 백이면 백 족족 '비싸'라는 말이 돌아왔다.
'그럼 어쩔 수 없이 알루미늄으로 하지 뭐.'라고 이야기하자 엄마는 화를 냈다.
"뿌리지도 않고 거두려고 하는 것은 도대체 왜 그러는 거니?"

 

화 낼 일도 아닌데 왜 그러나 싶었다. 그 이야기를 나누고 집에 돌아와 생각해보니, 영화과 시절처럼 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렇게  엄마에게 짜증을 냈던 이유는 이 전시가 비상업 전시(시에서 운영하기 때문)이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품들이고 돈 들여 봐야 내게 보장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에. 거기에 이것저것 가져다 놓고 정성스레 꾸미는 것은 상관없었지만 많은 돈을 들이고, 파손 위험이 있는 골동을 가져다 놓는 것이 그렇게 화가 났다. ‘돈도 되지 않고 나에게 아무것도 보장해주지 않는, 내가 좋아하는 것’ 을 열심히 하는 것이 티가 나는 것이 그렇게 화가 났다.

 '나는 이 상황이 열이 받는구나.'


모든 것엔 이면이 존재하는 것이겠지.

사실은 열이 받는다. 돈 들여 을지로에서 필름을 재스캔하고, 충무로에 가져가 인화하고 인사동에서 액자를 고르고 디자이너를 고용하지 못해 직접 현수막과 홍보물을 디자인하고 인쇄를 맡기고. 나를 갈아 넣어하는 일련의 과정들이 나의 커리어를 보장하지 않는다. 이 전시로 돈을 벌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 확정되어 있는 것이 사실은 열 받았다. 나에게 사진이 영화 대신 찾은 창작의 방법이며 이제야 좀 숨을 쉴 것 같다고 말했지만 여전히 이곳에서도 열 받는 일은 존재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https://soundcloud.com/aprilsour/160803a-1 

'신뢰받지도 사랑받지도 못하는데 도대체 왜, 어떻게 살아야 하지.' 하는 마음으로 띄웠던 영화의 엔딩 음악.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유빈과의 만남을 통해서 이 전시를 계속하고자, 그리고 만드는 일을 계속하고자 하는 용기를 얻었다. 그 시절 아무도 나를 몰라준다고 느끼던, 내 인생에서 단연코 가장 어두웠던 시기에 나는 모든 것을 뒤로하고 영화를 만들었다. 끝까지 해서 세상 밖에 내보냈다.


그리고 그것이 유빈에게 닿았기에, 그녀가 꼭 전하고 싶었던 말이 반대로 나에게 닿았기에. 결국 만드는 일은 그런 일이기 때문에. 그런 작은 만남의 순간들 때문에 나 역시 그렇게 이 악물고 영화를 계속했으니까. 나는 만드는 일이 계속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확신했다.


 무엇을 만드는 일은 사실 결단의 문제였다. 항상 이것도 할 수 있고 저것도 할 수 있는 경계에서 둘 다 잡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한쪽을 선택하지 않는 것도 결국 선택이었던 것이다.


무언가를 그렇게 만들고 싶다고 하면서 그런 스스로를 외면하다 보니 아주 커다란 허무에 부딪혀 모든 것에 시큰둥 해졌다. 삶 자체에도. 나에게 선택은 이제 생존의 문제이다. 꾸준히 쫓은 꿈을 따라 예대까지 졸업하고 나서도 무언가를 만들고 싶다고 떳떳하게 말하지 못했다. 그것은 아주 오랜 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만드는 것은 누구의 허락도 구하지 않는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자발적으로 나서 삶에 중요한 것들을 걸고 창작을 하겠다고 결심 할 누군가에게 나의 2년간의 기록이 도움이 되길 바라며 마치기로 한다.




 


이전 17화 뇌용량을 확인하는 방법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