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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gillness Jan 11. 2021

봄에서 봄으로 보내는 편지

2020년 5월 31일. 날씨는 맑음.

태어난 순간부터 내 시간은 아래로 흘렀다. 정확히 말하자면, 물과 하늘의 경계에서 시작해 끝이 보이지 않는 심연으로 가라앉고 있는 것이었다. 아른한 빛을 완전히 잃지 않으려면, 서늘한 바닥에 부딪혀 산산이 조각나지 않으려면 나로서는 하늘을 향해 발버둥 치는 수밖에 없었다.


쉼 없이 북쪽을 향해 달린 것도 시간을 거스르기 위함이었다. 깐냐꾸마리를 출발한 지 한 달여 만에 나는 소나울리에 도착했다. Y축을 따라 직선으로 달려 네팔에 도착하고 나서는, Z 축을 따라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를 생각이었다. 8,848m에서 추락한다면 바닥에 닿는 데도 한참이나 걸릴 테니, 그 정도 시간이면 충분했다.

 



무의미한 음절 여러 조각이 심장으로 날아들었다. 심장을 통과한 소리가 머리를 지나쳐 해독되는 시간, 3초. 정확히 3초가 지나고 무의미했던 소리는 비수가 되어 내 몸을 난도질했다. 승진이 아주 긴 여행을 떠났다는 것을 그의 친구로부터 전해 들었을 때의 일이다.


죽은 줄만 알았던 그가 멀쩡히 살아서 남국을 떠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아직 죽지 않았음에 감사해야 하는가, 아니면 땅과 하늘이 가장 가까워지는 그 시간만을 기다리며 사무치게 아파해야 하는가.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잘게 찢겨 나가는 내 몸뚱이를 바라봤다.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개운했다. 몇 년이나 밀어뒀던 벌을 받는 것처럼.



소나울리에서 곧장 룸비니로 향한 까닭은 순전히 미련이었다. 혜영을 처음 만났던 대성석가사, 공사가 한창이던 서늘한 대웅전의 모습이 궁금하기도 했고 매일 거닐던 신성구역의 따듯한 공기가 몹시 그립기도 했다.


여전히 바닥에 너부러진 자갈 때문에 릭샤가 덜컹댔다. 콧구멍을 가맣게 만드는 먼지가 호흡을 가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익숙한 감각 속에서 10년 전의 룸비니와 지금의 룸비니, 그리고 10년 아니 그 이상이 지난 룸비니의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사소했고, 사소해서 적당했던 그 모든 것들'

'시간의 흐름과 관계없이 10년 전의 적당했던 우리를 온전히 담고 있는 앨범과도 같은 장소'

이제는 내가 룸비니를 좋아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할 수 있겠지. 나는 여전히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사방으로 펼쳐진 사찰들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멈췄다.




지금쯤이면 내 소식이 혜영에게까지 닿았을 것이다. 혜영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아니 하고 싶지는 않지만 꼭 해야 하는 말 몇 마디를 떠올렸다. 혜영이 갖게 될 미련의 크기를 그대로 두고 싶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나는 싸구려 편지지에 문장 몇 개를 꾹꾹 눌러 적었다.


미안해.
후회한 적은 없어.
단지 그리웠을 뿐이야.
스물두 살이던 너의 웃음과 그 웃음을 바라보던 스무 살의 내 모습이.

안녕.
멈춘 채로 끝없이 이어진 도시에서,
봄의 내가 봄의 너에게.


승진의 편지가 도착한 것은 내가 무수히 쪼개진 날로부터 한 달쯤이 지난 후였다. 승진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땅의 끝에서 하늘을 봤을까, 아니면 끝없는 봄으로 남았을까.


멍하니 창가에 앉아 승진이 나에게 남긴 마지막 단어들을 무작위로 모아 허공에 대고 중얼거렸다.


멈춰있는 나에게 봄이 왔어.
아마 마지막 봄이겠지.
서른 살이 훌쩍 넘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지난 봄날을 그리며 얼마간 버티는 것뿐이야.
안녕, 고마웠어.




나는 문득 물병에 담긴 꽃 한 송이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내가 꺾어버린 꽃, 시드는 일밖에 남지 않은 쓸쓸한 꽃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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