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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gillness Jan 06. 2021

수색역 굴다리를 거니는 싸늘한 민달팽이

"어이, 내 말을 좀 들어봐. 자네 종교가 있나? 하느님을 믿느냐 이 말이야. 아니면 부처님, 그것도 아니면 알라신이라도."


어두컴컴한 수색역 굴다리에서 경택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쉬지 않고 헛소리를 내뱉는 노숙자에게서 시선을 거두는 것뿐이었다. 초로의 노숙자는 족히 300mm는 될 법한 발바닥을 어루만지며 말을 이어갔다.

"나지 마라, 죽기 괴롭다. 죽지도 마라, 나기 괴롭다. …"

천장에 간신히 매달린 전구가 두어 번 깜빡이더니 이내 빛을 잃었다. 우주의 중심과도 같은 굴다리 한가운데서 경택이 걸음을 멈춘 까닭은 PD에게서 연락이 왔기 때문도, 잊을만하면 찾아오는 공황 때문도 아니었다. 차라리 노숙자를 향한 연민 혹은 시큼한 냄새를 풍기는 그의 주둥이에 대한 경멸 따위의 얄팍한 감정이 일었다면 경택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갈 길을 갔을 것이다. 하지만 실없는 그의 몇 마디는 몇 달째 경택의 새벽잠을 앗아간 사색을 관통해 버렸다.

'내가 딱 그래. 죽는 것도 사는 것도 다 귀찮고 짜증 난단 말이야. 죽는 날을 굳이 꼽자면 내년 크리스마스가 좋겠고, 살아야 하는 이유를 굳이 찾아야 한다면 부모님이겠지.'




경택은 어느 동네에나 있을 법한 붉은색 벽돌로 지어진 다세대 주택 안으로 들어갔다. 옥상 귀퉁이에 초라하게 놓인 가건물에서 그는 두 달째 지내는 중이다. 하지만 그곳을 그의 집이라고 말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의 집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향이라 부를만한 정겨운 시골 동네도, 친구와 가족이 살아 숨 쉬는 평범한 주택단지도, 마음을 놓고 다리를 뻗을만한 작은 방 한 칸도 그에게는 없다. 심지어 날림으로 쌓아 올린 판넬 뭉텅이마저도 불법 건축물일 테니, 법적으로 보나 무엇으로 보나 그는 끈적한 민달팽이 신세였다.


경택은 담배를 꼬나물며 철길 건너편을 쏘아봤다. 으리으리한 MBC 신사옥과 SBS 프리즘 타워가 내뿜는 야릇한 불빛이 경택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마침, 아래층 남자가 터벅터벅 옥상으로 올라왔다. 경택이 살까 말까, 며칠째 고민 중이던 호카오네오네 슬리퍼가 까무잡잡한 그의 발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경택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또 보네요."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경택이 요즘 들어 느끼는 인간에 대한 지독한 환멸을 그의 탓으로 돌려도 아마 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사람이 어찌 저렇게 매정할 수 있다는 말인가, 사람이 사람과 더불어 살지 않는 것이 과연 가당키나 한 일인가. (주인아저씨의 말에 따르면) 전적으로 경택의 것으로 되어 있는 옥탑을 잘만 이용하면서도 싸늘하게 구는 그의 태도가 자못 짜증이 나서 경택은 혼잣말을 작게 뇌까렸다.

"씨발놈 담배는 왜 올라와서 피고 지랄이야."




"태어남은 허공의 한 조각 구름이 홀연히 드러난 것과 같고, 죽음은 일어난 구름이 사라진 것과 같다 했다. 구름 아래서 발버둥 치는 우리는 얼마나 헛되고 허전한가."


그는 며칠째 같은 자리에 앉아, 지난번과 비슷한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 라싸에서 태어났다면 승려가, 바라나시에서 태어났다면 사두가 됐을 그는 하필 서울에서 태어나는 바람에 한심한 노숙자가 돼버렸다. 경택은 안타까운 마음을 썩 숨겨둔 채, 걸음을 재촉했다. 밤새 시끄러운 스카나 레게를 틀어놓은 아래층 남자 때문에 늦잠을 자 버렸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그 인간은 배려 아니,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도 없는 인간도 아닌 인간이다. 경택은 미간을 찡그리며, 귓가를 울리는 '스카, 스카, 스카' 기타 소리를 무시하려 애썼다. 굴다리의 끝을 30m쯤 남겨둔 지점에서 노숙자의 기침 소리가 들렸다. 저 인간도 어지간하다. 사지 멀쩡한 몸뚱이를 왜 아깝게 썩히고만 있는지….




메인 프로듀서가 회식을 하자고 징징대는 바람에 경택과 팀원들은 상암동의 한 냉동 삼겹살집에 있었다. 저 망할 PD놈은 돈도 많으면서 자꾸만 주둥이에 돼지기름을 들이민다. 지난달에는 잠실에 아파트도 샀다지. 그래 아껴서 더 많이 모아라. 모으고 또 모으다가 한 푼도 못 쓰고 어느 날 갑자기 죽어 버려라. 경택은 여느 날처럼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다가, 슬그머니 자리를 빠져나왔다. 한참을 걷다가 들어선 수색역 굴다리에서는 원인 모를 포근함을 느꼈다.


굴다리 한가운데서 노숙자는 경택을 몇 차례 쏘아보더니 말했다.

"오늘은 늦었구먼. 대충 하라고. 그런다고 뭐가 바뀔 것 같은가?"

하지만 그의 말이 몽롱하게 술에 취한 경택의 귀까지 닿는 일은 없었다. 경택은 바닥에 놓인 콜라 캔을 걷어차며 생각했다. '오늘도 그 새끼가 내 말을 씹으면 가만두지 않겠어. 옥상 문에 자물쇠를 달든가 해야지. 어디 담배 피울 때마다 5층 계단을 오르내려 봐라. 무릎이 시린가 안 시린가.'




경택은 방에 불도 켜지 않고 쪼그려 앉아 아래층 남자를 기다렸다. 잠시 후 그는 이너서클의 '아라라라라롱'을 흥얼거리며 옥상으로 올라왔다.

"저기요, 밤에는 음악을 작게 틀든지 끄든지 하세요. 새벽에 옥상으로 올라오면서까지 노래를 틀어대면 어떡합니까?"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바닥과 천장을 나눠 쓰는 사이 아니, 같은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예의란 게 있지 않은가. 경택은 씩씩거리며 바닥에 가래침을 내뱉었다. 아마 그는 경택이 자기 눈앞에서 교통사고를 당해도 본체도 하지 않을 것이다. 삐걱거리는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가니, 아침에 켜놓고 간 TV에서는 '한끼줍쇼'라는 별 거지 같은 프로그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저 치들이 만나는 사람들은 어쩜 저리 따뜻하고 밝기만 한 것인가. 우리 동네에 한 번 와보라지. 싸늘함에 코끝이 아리게 만들어 줄 테니.'




미지근한 바람이 몰아치는 수색역 굴다리는 너무나 단조롭고 따분해서 되려 살풍경하게 느껴졌다. 살아 숨 쉬던 좁다란 터널이 며칠 새 채도를 완전히 잃은 까닭은 무엇일까? 경택이 변한 것은 확실히 아니다. 그렇다면 경택을 둘러싼 다갈색의 세상이 조금 뒤틀린 것일까? 아마 그것도 아닐 것이다. 지랄 맞던 방송국 직원들은 여전히 지랄 맞고, 아래층 남자 역시 여전히 사람보다는 오히려 로봇에 가깝다. 경택은 따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굴다리 한가운데서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된소리가 조금 섞인 외침은 굴다리의 양 끝을 통과함과 동시에 소멸될 뿐이었다.


굴다리를 빠져나오자마자, 경택은 잠깐 중심을 잃은 채 휘청거리고 말았다. 아무런 색채가 없는 기다란 터널을 통과하기란 여간 괴로운 일이 아니다. 그 순간 경택의 몸 상태를 '울릉도를 출발해 이제 막 독도에 도착한 사람의 멀미' 정도로 설명하면 어떨까 싶다. 아니다. 요 며칠간 수색역 굴다리는 지나칠 정도로 길게 느껴졌으니, 차라리 '원양어선에서 몇 년을 지내다 아메리칸 사모아의 어느 항구에 도착한 선원의 땅멀미' 로 설명하는 게 더 낫겠다.




그 날 저녁, 경택은 수색역 굴다리가 아닌 트로트가 울려 퍼지는 택시 안에 있었다. 기사 아저씨는 걸어가면 금방인 거리를 뭐하러 빙 돌아가느냐고 타일렀지만, 경택으로서는 하릴없었다. 대로를 질주하는 택시 주변으로 방송국의 환한 불빛이 쏟아져 내렸다. 굴다리나 삐까뻔쩍 요란한 DMC의 분위기나 역겹기는 매한가지였다. 자꾸만 '찐, 찐, 찐'을 외치는 기이한 노래를 끝으로 택시는 멈춰 섰다.


다행히 옥상에 걸어둔 자물쇠는 멀쩡히 잘 걸려있었다. 한 번 올라오기도 이렇게 숨찬데, 아래층 남자는 요 며칠간 지독하게 경택의 욕을 해댔을 것이다. 경택은 몇 달간 그에게서 느낀 환멸과 분노를 반추하며 담배를 물었다. 하루의 끝이 이토록 완벽한데도 자꾸 쓸쓸한 기분이 드는 까닭은 무엇일까. 쌀쌀한 날씨 때문일까, 아니면 철도를 사이에 두고 극명하게 대조되는 두 동네의 분위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언젠가부터 사라져 버린 사람의 온기 문일까.




며칠 전부터 굴다리에서 골콤한 악취가 풍기기 시작했다. 평소 같았으면 인상을 잔뜩 찡그리며 코를 막았겠지만, 색깔을 완전히 잃은 굴다리에서 냄새가 풍긴다는 것은 분명 긍정적인 징조였다. 그래, 무색무취보다야 유색악취가 더 정겹고 사람 사는 냄새에 가깝다. 경택은 상쾌한 마음으로 굴다리를 빠져나왔다. 생각해보니, 한동안 그를 괴롭히던 땅멀미도 완전히 사라진 지 오래다.




여남 살쯤 돼 보이는 아이가 자전거를 타다가 주차된 차를 긁고 말았다. 아이는 이 사실을 모르는지, 해맑게 웃으며 끝없이 이어진 붉은색 벽돌 사이로 사라졌다. 경택은 안절부절못하며 차 앞을 서성였다. 그때, 검은색 그랜저의 주인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1층 여자의 집에서 나왔다. 왜인지 얼굴이 달아오른 그는 잠깐 야릿한 미소를 짓더니, 바지춤을 추켰다. 그리고 그 민망한 쾌락도 잠시, 그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자신의 차를 확인하더니 경택을 향해 대뜸 소리쳤다.

"이거 당신이 그런 거야? 당신이 긁은 거냐고?"

경택은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지만,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럴 때면 경택은 종종 프로이트의 이론을 떠올리곤 한다. '그래. 내가 지금 머뭇거리는 이유는 분명 트라우마 때문이지. 아마 아버지 때문일 거야. 그는 한없이 온화하다가도 불같이 화를 내곤 했으니까.'


아저씨의 화가 조금 누그러졌을 때, 경택은 차분히 설명했다.

"제가 긁은 게 아닙니다. 아까 꼬마애 하나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갔는데, 그때 그 녀석이 그랬을 거예요. 못 믿으시겠으면, 저기 담배 피우는 저 남자에게 물어보시든지요. 저 사람도 아까부터 계속 여기 있었으니."

아저씨는 아까보다 얼굴을 더 붉힌 채, 아래층 남자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아래층 남자는 자신은 아무것도 못 봤다고, 바쁘니까 이제 들어가 보겠다고 말한 뒤 쏜살같이 사라졌다. 아저씨의 시선은 다시 경택을 향했다. 경택은 인아저씨를 불러 흐릿한 폐쇄회로 TV를 보여주고 나서야 누명을 벗을 수 있었다.


다시 옥탑으로 올라와 담배에 불을 붙이는데, 아래층 남자가 떠올라서 경택은 단발의 괴성을 질렀다. 아무리 그래도 이웃인데, 내가 요즘 그에게 쌀쌀맞게 군 까닭은 오롯이 그가 쌀쌀맞았기 때문인데 조금 너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지독한 무관심과 그로 인한 분노로 일관되는 우리 사회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과연 그 길이 옳은 것인가. 이 사건을 계기로 사람에 대한 경택의 환멸과 짜증은 더욱 깊어졌다. 하지만 이런 부정적인 생각을 경택이나, 아래층 남자의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다분히 부당한 일이다.


이것은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님과 동시에 모두의 잘못이다.




세찬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 굴다리만큼 마음이 편안해지는 장소는 그 어디에도 없다. 단순히 비바람을 막아주는 것만으로도 그곳의 역할은 충분하다만, 후드득 들려오는 빗소리는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 주기까지 한다. 하지만 오늘은 예외였다. 꿉꿉한 공기와 굴다리에서 풍기는 악취가 만나 형용할 수 없는 불쾌함을 자아냈기 때문이다. 굴다리 중간에 아직 못 미쳤을 때 경택은 쓰레기 더미를 지그시 지르밟으며 생각했다. '지금이라도 돌아 나가야 할까, 아니면 끝까지 걸어가야 할까.' 그러면서도 경택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으니, 정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 듯했다. 코끝을 마비시키는 냄새는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인가.


화려한 불빛을 뒤로하고 구시가지에 발을 디딘 경택은 오랜만에 땅멀미에 시달렸다. 아마 두 달 만이었을 것이다. 그는 까슬까슬한 시멘트 기둥을 부여잡고 소리쳤다.

"후, 후, 다신 안 와. 개 같은 굴다리 다신 안 와."

하지만 그가 내일 이 시간에 어디 있을지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다. 그는 내일도, 모래도, 또 그다음 날에도 굴다리를 통과하며 같은 말을 내뱉을 것이다.




며칠째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아래층 남자가 어쩐 일인지 오늘은 먼저 말을 걸어왔다. 라이터 하나 때문에 굵은 빗방울을 뚫고 편의점에 다녀오기는 귀찮았던 모양이다. 경택은 무심한 척 그에게 터보 라이터 하나를 건네줬다. 그는 머쓱하게 웃으며 실없는 농담 몇 마디를 던졌다. 갑자기 치솟는 짜증을 가까스로 억누른 경택역시나 머쓱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저도 요즘에는 레게를 들어요. 밤낮으로 엿듣다 보니 익숙해지더라고요."

남자는 고개를 떨구며, 그동안 참 미안했다고 말했다. 경택은 잠깐 미간을 찡그리더니, 괜찮다고 사실 옥상 자물쇠 비밀번호는 0000이었다고 언제든 올라와도 좋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훈훈한 분위기가 다세대 주택단지를 감쌌다. 하지만 서늘하게 식은 밤바람을 식히지는 못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적당히 잘 되었다.




느지막이 일어나 방송국으로 향하던 경택은 몇 번이나 고심하다 굴다리에 발을 디뎠다. 열 걸음쯤 걸었을까, 경택은 헐레벌떡 밖으로 뛰쳐나오더니 이미 완전히 비어있는 속을 또 한 번 비워냈다. 노란색 점액질 액체가 경사로를 따라 한참 흐르다가 굴다리 안으로 들어갔다.




아래층 남자와는 이제 가볍게 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매일 밤 아래층에서 흘러나오던 음악 소리가 멎은 것이 내심 서운하기도 했지만, 경택은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한 상태가 되었다. 아마 비비 꼬여있던 그의 속마음이 어느 정도 풀렸기 때문일 것이다. 이 정도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다. 방바닥은 조금 끈적하고, 창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은 조금 선선하며, 항상 사람을 향하던 분노는 어느 순간 자취를 감췄다.




퇴근길, 마스크 한 장을 손에 쥐고 굴다리로 향하던 경택은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노란색 폴리스 라인이 굴다리 입구를 단단히 틀어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택은 팔짱을 끼고 굴다리 안을 들여다봤다. 흰 천으로 감긴 들것이 구급대원의 손에 이끌려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상황이 빨리 마무리된 것을 보면, 굴다리 안에서 개나 고양이 따위의 시체가 발견된 듯했다.


하지만 동시에 경택의 마음속에는 원인 모를 찝찝함이 가득 들어찼다. '아니, 근데 경찰은 뭐고 앰뷸런스는 또 뭐람. 굴다리 안에서 살인 사건이라도 일어난 건가?' 경택은 차마 굴다리를 지나지 못하고 대로변으로 나가 택시를 잡아탔다. 그리고 또 한 번 생각했다. '그래도 굴다리가 막히지 않은 게 어디야. 그거면 된 거지.'




다음날 경택은 산뜻한 마음으로 굴다리에 들어갔다. 특별한 일은 없었는데, 봄기운이 완연한 아침이 어지간히 수수하기는 했다. 몇 달 동안 터널을 가득 메우던 불쾌한 냄새도 사라진 듯했다. 봄이면 어디에서나 들려오는 모 밴드의 노래가 그의 입에서도 저절로 흘러나왔다. 이래야 봄이고, 봄이어야 생기가 돈다.


터널의 정중앙에 다다른 경택은 걸음을 멈추고 바닥에 놓인 몇 가지 물건을 쏘아봤다. 막걸리병 서너 개와 300mm는 족히 될법한 신발, 그리고 구직광고가 빼곡히 적힌 무가지 몇 장이 전부였다. 아마 지금도 어디에선가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을 노숙자 아저씨의 물건 같았다. 생각해보니 그를 보지 못한 지도 꽤 오래다. 빚쟁이가 찾아왔거나 무료 급식을 나눠준다는 교회 근처로 거처를 옮겼을 테지. 노숙인들의 삶이란 보통 그런 식으로 흘러가니 말이다.




한편, 경택이 떠난 자리에서도 봄기운이 일렁였다. 그러니까 굴다리, 자세히 말하자면 굴다리의 정중앙, 더 자세히 말하자면 굴다리의 정중앙에 놓인 커다란 신발 안에서 말이다. 꿉꿉한 신발 속에서는 수백 마리의 새 생명이 움트고 있었다. 구더기라고도 불리는 파리목 곤충의 유충이 바로 그 새 생명이었는데, 그들은 노숙자 아저씨의 말마따나 나기 괴롭고 죽기도 괴로운 세상이 뭐가 그리 좋은지 격하게도 꿈틀거리고 있었다. 징그럽지마는 대견하고, 대견하면서도 안타까운 광경이다.


그들을 그토록 꿈틀대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간절히 바라는 무언가가 있는 것일까? 일차원적으로 생각해 보자면,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건 단순한 본능이겠지. 먹고 싸고 자고 하는 것들 말이다.

아 참, 그런데 그들은 신발 속에서 무엇을 먹고 저렇게 자란 걸까? 설마 아저씨의 발가락은 아니겠지. 뭐, 들것에 실려 나간 사람이 아저씨였다면 안될 것도 없는 일이지.




신발 속 아니, 소우주에서 벌어지는 생명의 기운을 느끼지 못한 건지, 경택은 지극히 평범하고 따분하게 일상을 버텨냈다. 굴다리 안에서 벌어진 모든 일들은 사실 없는 일과도 같아서 오히려 무덤덤한 편이 당연해 보였다. 경택은 몇 번이나 더 수색역 지하차도를 지났고, 그러면서 별 의미도 없는 생각을 자아냈다. 게 중에는 산뜻한 것도, 우울한 것도 있었지만 그런 사사로운 감정에 의미를 부여하지는 말도록 하자. 단순히 날씨가 맑았고, 또 흐렸을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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