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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gillness Mar 31. 2021

사라진 것들을 위한 (1)

평범한 어느 날의 하늘.

"글쎄요. 이런 상담은 처음이라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

"부담 갖지 않으셔도 돼요. 먼저 그분을 처음 만났던 날에 관해 이야기해볼까요? 아무 말이나 하셔도 되고, 아직 불편하시다면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

"음

처음 만난 곳은 트빌리시였어요. 꼬불꼬불한 골목 깊은 곳에 숨겨진 작은 카페. 그때는 조지아라는 나라 자체를 는 사람 많지 않았으니까, 만남 자체가 뜻밖이었던 셈이죠. 제가 먼저 카페에 들어와 있었어요. 커피를 한 잔 시키고, 눈에 띄지 않는 구석 테이블에 앉아서 평소처럼 일기를 썼죠. 열심히 끄적이다가 목이 뻐근해서 고개를 들었는데, 마침 차임벨이 울리더라고요. 여기저기 나비가 앉아있는 꽃 모양 차임벨이. 그리고 그 사람이 카페 안으로 들어왔어요. 우리는 얼결에 눈이 마주쳤고요. 누가 보면 제가 그 사람을 애타게 기다리는 거로 오해할 수도 있었을 거예요."

.

"그때, 혜윤 씨의 속마음은 어땠나요? 서로의 눈이 마주친 바로 그 순간에요."

.

"글쎄요. 별다른 생각이 들었던 것 같지는 않아요. 아마 조금 놀랐을 거예요. 저와 비슷한 외향을 가진 사람을 본 게 참 오랜만이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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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그때 혜윤 씨의 속마음을 '반가웠다' 정도로 이해해도 괜찮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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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요. 오히려 반대였어요. 이질감이 조금 느껴졌던 것 같아요. 거의 5년 동안 한국에 다녀오지 못했으니까요. 말하고 나니까 조금 웃기네요. 먼 타국에서 동향 사람에게 느끼는 이질감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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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도 유년시절을 독일에서 보냈거든요. 그것도 작은 시골 마을에서요.

8살쯤 됐었나, 학교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어요. 학교에서 집으로 가려면 마을 한가운데를 가로질러야 했는데, 마을 어귀에 작은 양장점이 있었어요. 평소처럼 고개를 숙이며 길을 걷다가, 그날은 우연히 양장점 쇼윈도를 바라봤어요. 아주 우연히 말이에요.

쇼윈도를 정면으로 마주하니까,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심장이 쿵쿵 뛰었어요. 깜짝 놀랐거든요. 뭐를 보고 깜짝 놀랐는지 아세요? 쇼윈도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번들번들한 유리창에 웬 동양인 꼬마 하나가 있더라고요. 참 특이하고 이상하게 생긴 꼬마애가요. 내가 동양인이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외국인 한 명 없는 작은 마을에서 오래 살다 보니 잠깐 잊었던 거예요. 나도 동양인이라는 걸, 이곳에서 나만 한없이 겉돌고 있다는 걸. 저는 저 자신에게 이질감을 느꼈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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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이 되기도 하지만, 조금 서럽고 가슴 아픈 이야기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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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억이 제게는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어요. 말이 조금 길었네요. 미안해요. 아무튼, 그다음에는 무슨 일이 있었나요? 서로 눈이 마주친 그다음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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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은 제 맞은편 테이블에 앉았어요. 입고 있던 코트를 의자에 걸치고 지그시 눈을 감더군요. 많이 피곤했을 거예요. 집을 떠나 나돈다는 게, 역마에 이끌려 이곳저곳을 떠돈다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니까요. 저는 눈길을 돌리지 않고 계속 그 사람을 바라봤어요. 귀에 이어폰을 꽂고 펜을 잡아봐도, 자꾸 시선이 그쪽으로 갔어요. 그건 불가항력이었어요. 그 사람은 꽤 오랫동안 눈을 뜨지 않았어요. 저도 그때까지 눈길을 거두지 않았고요. 결국에는 머뭇거리던 웨이터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고, 저도 동시에 고개를 돌렸죠. 하지만 그때까지도 사랑이라는 감정, 좋아한다는 감정이 싹트지는 않았어요. 전혀요.


이따금 하늘을 올려다볼 때가 있어요. 보통은 곧바로 고개를 숙이는데, 가끔은 길 한가운데 멈춰 서서 밤이 될 때까지 하늘을 바라보고 싶어 져요. 하늘의 색깔이 특이한 것도, 구름이 평소보다 더 아름다운 것도 아닌데도요. 그 이유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산도 바다도 그렇지 않은데, 하늘은 그래요.


그 사람은 어느 날의 하늘이었어요. 길 한가운데 벌러덩 누워서 대책 없이 바라보고만 싶은 어느 날의 하늘."

.

"하늘이라…. 그분은 혜윤 씨에게 하늘로 왔군요. 지극히 평범한 어느 날의 하늘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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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그 사람이 떠난 후로, 한 번도 하늘을 올려다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단 한 번도."

.

"밤이 되었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캄캄한 밤에는 하늘과 땅의 경계가 사라지니까요.

어, 그런데 여기도 벌써 해가 졌어요. 7시가 넘었네요. 못다 한 이야기는 다음 주에 하는 거로 해요."





"어서 와요. 벌써 봄이네요. 출근길에 보니까 벌써 벚꽃이 폈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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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라는 단어는 참 포근한 것 같아요. 봄, 봄, 봄…, 자꾸 되뇌기만 해도 봄이 오는 느낌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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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봄, 봄…. 정말이네요. 봄기운이 완연한 오늘은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볼까요. 아, 먼저 말을 건 사람은 누구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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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먼저 건 쪽은 오히려 그 사람이었어요. 신히 눈을 떼고, 카페에서 나가려는데 저를 부르더라고요. '저기요!'하고 말이에요. 낌이 이상했어요. 오랜만에 모국어를 들어서인지, 그 사람의 목소리가 예상한 것과 조금 달라서인지 아무튼 조금 생경하더라고요.


그 사람은 성큼성큼 내 앞으로 걸어오더니, 노트를 들이밀었어요. 내 일기장이더군요. 분명 노트를 펼쳐놨었는데 그 사람이 혹시 봤을까, 봤다면 어디를 봤을까…, 그렇게 생각하니까 곧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어요. 어쩔 줄 몰라서 발만 동동 구르다가, 고맙다고 말하고 얼른 발길을 문 앞으로 돌렸죠. 근데 그 사람이 제 손목을 잡아끌지 뭐예요? 그즈음에는 얼굴이 달아오르다 못해 건들면 '뻥'하고 터질 듯 붉어졌을 거예요.


그 사람이 물었어요. 혹시 지난겨울 라트비아에 있지 않았냐고, 종종 눈이 소복이 쌓인 리가 구시가지 광장에 앉아 책을 읽지 않았냐고. 나는 깜짝 놀라서 어떻게 알았냐고 되물었죠. 정말 리가에 있었거든요. 추운 줄도 모르고 광장에 우두커니 앉아 책도 읽었고요. 그 사람이 웃으며 대답했어요. 함박눈이 내리는 한겨울, 발트해 연안 공원에 앉아 맨손으로 책장을 넘기는 동양인을 어떻게 있겠냐고. 그건 자고 일어날 때마다 자신의 이름을 잊는 것보다 더 어리석고 불가사의한 일이라고.

저는 얼굴이 더욱 붉어져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요. 멍하니 그 사람을 바라보기만 했죠.


그는 코트를 고쳐 입고, 나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어요. 그리고 작게 속삭이더라고요.

"두 번까지는 우연일 수 있는데, 세 번은 아니에요. 그건 스토킹이거나 인연이죠. 혹시 스토커이신가요? 저는 아니거든요."

저는 달아오른 얼굴을 조금 식히면서 피식 웃었어요. 참 우스웠을 거예요. 압력솥처럼 달아올라서 조금씩 훈김을 내뱉는 게.


그 사람은 문고리를 손에 쥐고 멈춰 서서 말했어요.

"다음에 또 봐요. 그때는 인연으로요."


그리고 다시 차임벨이 울렸어요."

.

"영화 같은 이야기네요. 단편 영화 한 편을 다 본 느낌이에요."

.

"뭘요. 오글거리기만 하는데요. 근데 그때는 지금과 느낌이 조금 달랐어요. 나이가 어렸기 때문일까요? 뭐랄까, 조금 더 설레고…, 아니 설렌다는 말로는 부족해요. 전기충격기로 가슴께를 서너 차례 지져버린 느낌이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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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의 첫인상이 그만큼 인상적이었다는 이야기군요. 혜윤 씨의 가슴 저 깊은 곳까지 찌릿함이 전해질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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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은 항상 그랬어요.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던 날까지도…. 그때는 왜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을까요. 그가 그 말을 한 이유를 알아채지 못했을까요. '자고 일어날 때마다 자신의 이름을 잊는 것보다 더 어리석고 불가사의한 일'이라는 그 말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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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윤 씨 조금 진정하고 깊게 숨을 쉬어봐요. 괜찮아요."




"조금 괜찮아졌어요? 표정은 한결 나아 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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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요. 부끄럽네요. 이미 지난 일인데, 많이 무뎌졌다고 생각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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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가슴 깊은 곳에는 뾰족한 가시 몇 개가 박혀 있어요. 개중에는 짧고 얇은 것도, 깊고 두꺼운 것도 있죠. 가시가 심장께에 박히는 순간은 물론이고, 박힌 가시 사이로 옅은 물결만 일렁여도 우리는 많이 아파해요. 하지만 그렇다고 가시를 뽑아내지 않을 수는 없어요. 가시는 점점 가슴 깊은 곳으로 파고들 테고, 언젠가는 가시가 박힌 곳 주위가 새까맣게 곪아 터질 테니까요. 사람의 몸과 마음은 생각보다 여려요. 때로는 한없이 덧없고 보잘것없게 느껴지지 않나요? 혜윤 씨도 이미 느꼈다시피, 우리가 견딜 수 있는 고통에는 분명 한계치가 있어요. 감정의 고름이 점점 차오르다가 한계치에 다다르면…, '펑' 상상하기 싫은 일이 일어나죠. 어제는 아주 아팠을 거예요. 깊이 박혀있는 가시를 쑥 뽑아낸 날이었으니까요."

.

"더 아프지 않을 수는 없는 걸까요? 매일매일 고통을 간신히 견디며, 하루를 그저 살아내는 느낌이 들어요. 어딜 가나 그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을 마주할 때마다 저는 고통스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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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하게 말하면, 그건 불가능한 일이에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좋았던 기억을 더 좋게, 아팠던 기억을 조금 덜 아프게 포장하는 것뿐이니까요. 아, 딱 하나 방법이 있기는 하네요. 모두 잊어버리는 것. 처음부터 없었던 일처럼, 혜윤 씨의 인생에서 그 사람을 삭제시키는 것. 근데 그럴 수는 없잖아요. 당장 덜 아프자고 소중했던 모든 순간들을 봄에 내리는 눈처럼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게 만들 수는 없어요. 그럼 우리는 방향을 잃고 평생 헤매고 말 거예요. 빛과 어둠을 한데 뭉쳐 주물러 봐야, 무수히 많은 회색이 만들어질 뿐이에요. 아무런 감정도, 온기도 느껴지지 않는 진한 회색이."




"이듬해 겨울에는 제주도에 있었어요. 어쩌다 보니 제주도에 정착하게 됐죠. 제주에 있는 동안은 일만 하며 지냈어요. 이럴 거면 뭐하러 제주도에 왔나 싶을 정도로 육지를 자주 오갔고, 주말도 없이 바쁘게 살았던 것 같아요. 찬 바람이 불던 어느 날에도 서울에서 급한 미팅을 마치고 다시 제주로 가는 비행기에 올라탔어요. 평소처럼 일을 마치고 비행기에 탔을 뿐인데, 그때는 이상하게 심장이 쿵쾅대더라고요. 마치 여행을 다니던 때처럼요. '이상하다, 이상하다…' 생각만 하다가 비행기에서 내렸죠. 자꾸만 소리를 내는 심장을 간신히 진정시키고 밖으로 나갔어요. 계속 공항에 있으면 안 될 것 같았거든요. 근데 마법처럼 그 사람이 거기에 있더라고요. 제주에요. 아마 영화에서처럼 같은 비행기를 타지는 않았을 거예요. 제가 그 비행기를 탄 사람 중에는 가장 빨리 밖으로 나왔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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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인연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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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와의 인연은 '그렇게 그들은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식의 아름다운 동화로 끝나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시련이 연속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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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수도 있겠어요. 인연이 꼭 긍정적인 의미를 포함하지는 않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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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제가 먼저 그 사람에게 알은체했어요. 슬며시 그의 뒤로 다가가서 어깨를 두드렸죠. 무덤덤하게 뒤를 돌아보더니 저를 보고서는 활짝 웃더라고요. 그때 제가 때를 놓치지 않고 말했죠. 이제 우연은 아닌 것 같다고. 같이 차나 한잔 하자고요.


하지만 그 사람의 표정은 점점 굳어져 갔어요. 조금 후에는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더라고요. 마치 운명처럼 다가온 인연을 애써 거부하는 사람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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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부할 수 있는 인연이라니. 제가 여태 생각해왔던 인연과는 조금 다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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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하릴없이 얼굴을 붉혔어요. 그 사람은 꽤나 형편없는 핑계를 대더군요. 정말 그러고 싶은데, 그럴 수 없다고. 이해하기 어려운 걸 잘 알아서 애써 이해시키고 싶지 않다고…. 거기에 대고 무슨 말을 하겠어요. 그냥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자리를 피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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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요. 듣는 저도 이렇게 가슴이 저릿한데, 혜윤 씨는 어땠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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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다기보다는 그 상황이 조금 비현실적이었어요. 실감이 나지 않더라고요. 마땅히 할 수 있는 일도 떠오르지 않았고요. 그래서 그냥 걸었어요. 공항을 나와서 큰길을 따라 계속. 다리가 저릴 때까지 걷다 보니 바다가 나오더군요. 겨울 파도가 아주 높고 짙은 용두암이라는 해안이. 벤치에 앉아서 멍하니 파도를 바라봤어요. 그 높이가 모두 일정하지는 않아서 제 감정을 보는 것 같더라고요. 높이 솟아올랐다가 바위에 부딪히고, 사소하게 밀려오다가 땅속에 스며들고….


가만히 파도만 보고 있으니까 금방 해가 졌어요. 때때로 파도에 비친 달빛이 산산이 부서져서 제게로 날아왔어요. 입술을 핥으면 짠맛이 났는데, 그 느낌이 나쁘지 않았어요. 무수히 많은 달빛이 제게 와서 닿는 느낌이랄까요. 그즈음에 엄마에게 전화가 걸려왔던 것 같아요.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주 오랜만에 엉엉 울었던 건 확실해요. 숨을 헐떡거리면서 전화를 끊고 눈물을 닦는데, 그 사람이 또 거기 있더라고요. 용두암 바로 아래에요. 조금 화가 났어요. 세 번째가 인연이면 네 번째는 과연 무엇일까. 돌고 돌아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걸까 싶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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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혜윤 씨는 어떻게 했어요? 달빛이 무수히 부서지던 그 밤이 마침내 혜윤 씨에게는 어떻게 남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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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서둘러 계단을 뛰어 내려갔어요. 다리를 삐끗해서 넘어지기도 했는데, 전혀 아프지 않았어요. 옷을 바닷물에 다 적시고, 무릎에 상처를 모른척하면서 그 사람에게로 달려갔어요. 그리고 꽉 끌어안았죠. 정말 그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거든요. 지금은 맞고 나중에는 틀리게 되더라도, 그렇게 해야만 했어요. 그 사람은 눈물을 글썽이더라고요. 시간이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더디게 흘렀으면 좋겠다고 말하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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