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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gillness Apr 07. 2021

사라진 것들을 위한 (3)

다시 하늘.

"그이의 기억은 점점 희미해져 갔어요. 그 시작이 언제부터였는지 저는 알지 못해요. 그이와 저는 두 손을 맞잡고 희뿌연 심연 속으로 가라앉았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어요. 사라진 기억을 다시 불러올 수도, 태연하게 사라지는 모습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을 수도 없었어요. 밝았던 하늘에는 어느새 완연한 어둠이 드리웠죠. 그이와 나는 몸부림쳤어요. 어느 곳에도 가닿지 않는 허무한 몸부림을요. 하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했어요.


그러 어느 시점에는 지쳐 쓰러지고 말았어요. 더는 움직일 수 없었어요.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이, 아니 우리가 휘발되는 모습을 멍하니 앉아 바라봤어요. 오감으로 흡수한 기억들은 오로지 눈을 통해서만 날아갔어요. 눈을 감아도 소용이 없었어요.


그이의 기억은 곧 완전히 소멸되었어요. 본능이라기보다는 습관만이 기억의 빈자리를 메웠어요. 그는 습관처럼 숨을 쉬고, 밥을 먹고, 저를 안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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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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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습관. 치료를 위해 조지아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던 날이 기억나요. 터키 공항에 착륙하기 직전, 구름을 가르며 날던 비행기가 난기류를 만났어요. 저는 눈을 질끈 감고 두 손을 꽉 맞잡았어요. 1년에도 수십 번 비행기를 탔지만, 매번 조금씩은 공황상태에 빠졌거든요. 숨이 점점 가빠지는 게 느껴졌어요. 이마에는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어요.


그때였어요. 그가 제 손을 잡았어요. 그의 기억 대부분은 이미 휘발되어 사라지고 없는데도 그는 제 손을 꼭 쥐고 저를 자기 어깨에 기대게 했어요. 습관처럼요. 의사들은 제 말을 믿지 않았어요. 그들은 하나같이 분명 제가 잘못 본 것이라고, 그럴 리 없다고 말했어요. 하지만 저는 기억해요. 그의 눈빛을요. 한없이 포근한 어느 날의 구름 같던 그의 눈빛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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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모두 떠난 자리에 사랑이 피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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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그를 그리워한다기보다는 희미해져 간, 아니 완전히 사라져 버린 그의 기억을 그리워해요. 그 기억들이 끊임없이 팽창하는 우주의 끝에 다다랐기를 바라요. 즉시 소멸되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우주의 끝을 넘어 또 다른 우주에 온전히 살아 숨쉬기를요.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는 걸 잘 알기에 가슴이 아려요.


그가 떠난 후로도, 제게는 무수히 많은 기억이 피어났다가 사라졌어요. 그는 이미 떠나고 없는데도, 제 기억 속에는 항상 그가 있어요. 새롭게 피어나는 기억에도, 지금 이 순간에도 사라지고 있는 무수히 많은 기억에도. 제 기억은 그의 기억처럼 오로지 소멸될 수는 없겠죠? 모든 불길이 잦아든 채로, 어둠이 드리운 채로 아픈 기억만 남은 마지막 밤을 맞이할 수는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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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인간의 세포는 7년을 주기로 생성, 소멸된다고 주장하는 학설이 있어요. 대략 7년 정도가 지나면 인간 몸의 모든 세포가 재생되어 교체된다는 학설이죠. 그렇다면 마음속 깊은 곳까지 아로새겨진 기억이 완전히 소멸되는 데까지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요? 7년이면 충분할까요? 글쎄요. 새롭게 피어나는 기억까지 모두 소멸시키기에 7년은 너무 짧은 시간일지도 몰라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리움과 그로 인한 고통은 조금씩 줄어들 거예요. 서서히 괜찮아지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도 밉고 화가 나겠지만, 어쩔 수 없어요. 인간은 원래부터 그런 존재인걸요. 고통이 잦아들면 그다음은 어떨까요? 시간이 흘러 그리움과 그로 인한 고통이 완전히 희석되면, 그때는 아름다운 추억만이 더욱 진하게 남을 거예요. 그리고 그 기분 좋은 추억은 7년, 14년, 21년이 지나 세포가 몇 번이나 새로 바뀌어도 결코 사라지지 않을 거고요.


추억은 그러니까, 긍정적인 감정이 포함된 추억은 결코 뼛속에 새겨지지 않아요. 그분이 떠나던 때를 떠올려 볼까요? 기억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그 시점이요. 기억이 모두 떠난 자리에, 습관처럼 피어난 사랑은 어디서 왔을까요? 7년을 주기로 단순히 생겨나고 사라지는 몸뚱이 안에서 왔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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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7년이 지나고 나서, 제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를 기억하지도 못하고, 그의 흔적이 하나도 묻어있지 않는 완전한 다른 사람이요. 그가 왔다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아예 그가 없었던 삶을 살았으면 해요. 그럴 수 있다면, 저는 어떻게 될까요? 그가 없는 삶에서 저는 무엇일까요? 아마, 아무것도 아니겠죠. 아무런 의미도 삶을 이어나가야 하는 이유도 없겠죠. 아, 그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네요. 아무것도 아닌 채로, 그가 없는 삶을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 게, 그게 더 좋겠네요.


그러고 보니 7년이었어요. 그와 제가 함께 지냈던 시간이요. 그와 처음 만났던 순간을 기억해요. 지그시 눈을 감고 앉아 트빌리시의 분위기를 마시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해요. 하지만 동시에, 그와 함께했던 마지막 순간들을 기억하기도 해요. 자고 일어날 때마다 자신의 이름을 잊고야 마는, 이따금 기억이 다시 돌아올 때마다 많이 아파하던 그의 모습을요.


제가 말씀하신 것처럼 살아가도 괜찮은 걸까요? 아파하는 그의 모습을 묻어두고, 산뜻한 봄기운이 완연했던 트빌리시의 기억만 가지고요. 아니, 그전에 제가 정말 그럴 수 있을까요? 가슴속 깊은 못의 바닥까지 스민 그의 농도가 점점 옅어질 수 있을까요?


아, 저는 그럴 수 없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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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윤 씨만은 태연하게 삶을 살아내는 자신의 모습을 증오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저는 한동안 그런 삶을 살았거든요. 죽을 자격도 없다며, 끝없이 스스로 벌을 줘가며. 그거 사람 할 짓이 못돼요. 단순히 자기 위안을 위한 수단으로 쓰일 뿐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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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결국 그렇게 되잖아요. 사람을 잃으면, 사랑을 잃으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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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지 않기 위해 우리가 이 자리에 있잖아요. 온통 사랑을, 사람을 향했던 에너지가 변환되어 자기 증오의 불씨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요. 사랑이, 사람이 오롯이 아름다운 기억으로만 남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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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할 수 있을까요? 아니, 그래도 괜찮은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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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건대 아름다운 추억만을 안고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여요. 무엇보다 혜윤 씨를 먼저 떠나간 그분은 혜윤 씨가 꽤 괜찮을 삶을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랐을 테니까요. 그분이 바라는 괜찮은 삶이란 결코 기억의 소멸을 의미하지 않을 거예요. 그것은 차라리 정화되고 승화된 무엇이겠죠.


부디, 완전한 소멸을 바라지 말아 줘요. 혜윤 씨를 위해서, 어느 날의 하늘로 왔다가 사라진 그분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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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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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아직 멀쩡한 것을 보면 분명 잘 지낸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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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봄이 왔네요. 여름과 가을을 뚫고, 차디찬 겨울을 간신히 버티고 나서야 다시 봄이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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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봄, 봄…. 정말 봄이 왔군요. 정신없이 사느라 봄이 온 줄도 몰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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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징조네요. 그동안 어떤 일이 있었나요? 실제로 있었던 일도 좋고, 무수히 일어났던 감정의 변화도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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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쉬어가기로 했어요. 급하게 달려갈 이유도, 또 그렇게 달려서 가닿을 곳도 없었거든요. 가장 먼저 조지아에 갔어요. 그와 처음 만났던 카페는 문을 닫았더라고요. 그래서 잠깐 울었어요. 아주 잠깐.


조지아에 다녀온 다음에는 태국에 갔어요. 제가 쓰러졌던 시장에서 밥을 먹고, 입원했던 병원에 들렀어요. 아, 병원에서 나오던 찰나에 간호사님을 만나기도 했어요. 그분도 저를 기억하더라고요. 한여름 대낮보다 더 뜨거웠던

한국인 남자와 그의 아내로요. 남편은 어디 두고 왜 혼자 왔느냐는 물음에는, 입을 꾹 다물고 웃음으로 넘겼어요. 가슴이 조금 아팠어요. 우리의 난 자리 그 이전과 다름없이 평온한 것 같아서요. 그런데 결국에는 괜찮았어요. 추억할 수 있는 장소가 하나 더 생긴 거니까.


사실, 지금은 막 러시아에서 돌아오는 길이에요. 3시간 전에 한국에 도착했어요. 이번에는 횡단 열차를 타고 꼭 북유럽까지 가려고 했는데, 그러지 못했어요. 결국 석 달이 넘게 블라디보스톡에서만 시간을 보내다 돌아왔죠. 마땅히 떠오르는 숙소가 없어서 그와 묵었던 게스트하우스에 찾아갔어요. 주인아주머니오랜만이라고, 반갑다고 말하면서 그때와 같은 방을 내어주더라고요. 큰 방을 혼자 쓰려니 조금 허전했는데, 그것도 괜찮았어요. 그 사람이 계속 옆에 있는 것만 같았거든요. 겨울이 지나고 찾아온 블라디보스톡의 봄은 어지간히 따뜻했어요. 그와 함께 보냈던 지난봄보다는 아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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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보다 더 따뜻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요. 봄의 냄새를 코로 맡을 수 있다면, 봄기운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면, 그거면 된 거예요. 그 정도면 적당히 잘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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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와 돌이켜보면, 정말 사무치게 아름다웠어요. 그 사람과 함께했던 모든 순간이요."





"창밖을 좀 봐요. 아니, 거기 말고 하늘이요. 오늘의 하늘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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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색깔이 특이하지도, 구름이 평소보다 더 아름답지도 않아요. 그냥 평범한 어느 날의 하늘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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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지극히 평범한 어느 날의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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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다시 하늘로 왔군요. 결코 사라지지 않고 어디에든 있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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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왜 또 울고 그래요. 봄이 왔는데요. 하늘이 저기 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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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하지 마세요. 정말 슬퍼서 눈물을 흘리는 건 아니에요. 그냥,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아서요. 하늘이 왜 거기에 있는지,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는지요.


올겨울에는 오이먀콘에 가야겠어요. 지구에서 가장 추운 한극도 그렇게 마냥 춥지만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요. 어쨌거나 거기에도 하늘이 있으니까, 그 사람이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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