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angillness Nov 25. 2020

 K의 죽음과 수근관 증후군

파타야에서 생긴 일.

A가 아침에 일어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삐걱거리는 창문의 경첩을 부서뜨린 것이었다. 녹이 잔뜩 슨 망할 창문은 희미한 새벽바람에도 쉬지 않고 '삐거덕삐거덕' 소리를 내었다. A는 갸름한 아이폰을 손에 쥐고 적갈색 경첩을 힘껏 내리쳤다. '퍽 퍽' 소리와 함께 경첩이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지난달 월급을 영혼까지 끌어모아 산 최신형 아이폰이 완전히 박살 났지만, 문제 될 것은 없다. 이제 연락 올 사람도 없는데 그깟 쇳덩이가 무슨 의미가 있으랴.


A는 유리 조각이 박혀 피가 '뚝 뚝' 떨어지는 손바닥을 바라보며, 또 한 번 K를 떠올렸다. K에게서는 짙은 시트러스 계열의 향수 냄새가 났다. 어쩌면 그 향수 냄새가 모든 문제의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 완전히 내려앉은 어둠 속에서도 K의 향수는 진한 흔적을 남겼을 테니, 피에 주린 그놈에게 레몬 향의 향수 냄새란 여왕벌이 내뿜는 페로몬보다 더욱 강렬한 자극이었을 테니.


때마침 TV에서 스물다섯 번째 피해자가 발견되었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듣기만 해도 온몸에 날이 서는 문장을 따뜻한 태국어로 듣고 있자니, 만감이 교차한다. 차라리 반대였으면 어땠을까 싶다. 따뜻한 내용을 차가운 언어로 건네 들었다면. 이를테면 K가 보낸 문자를 러시아어로, 아득히 아름다운 나태주 시인의 시를 핀란드어로.




A는 햇볕이 날카롭게 내리쬐는 워킹스트리트를 걸었다. K를 처음 만난 아고고 바의 커다란 돌출간판이 아슬아슬하게 덜렁거렸다. 지나치게 끈적하고 뜨거운 공기 속에서도 마음 한 편이 서늘한 채로 있는 것을 보면, K는 분명 유의미한 사람이었다. 씩씩거리며 아고고 바의 대문을 몇 번 걷어차 봤지만, 미동도 없었다. A는 묵직한 돌출간판이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워킹스트리트 구석구석을 돌아다녔지만, 그놈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고작 160cm에 50kg 정도의 아담한 체구인 범인이 스무 명이 넘는 사람을, 그것도 모두 손으로 목을 졸라 죽였다니. 때마침 흰색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우르르' 지나갔다. 뉴스에 따르면, 두유를 마시는 저 년도, 모구모구를 마시는 저 놈도, 아무 생각 없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는 저 놈도 범인일 수 있다.


A는 담배를 꺼내 물고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오늘따라 유난히도 손목이 시큰다. 수근관 증후군, 그러니까 손목 터널 증후군이라고도 불리는 이 질환은 몇 년째 A를 괴롭혔다. 묵직해진 양 손목을 비비 돌리며 바닥에 침을 뱉어냈다. 어제, 지난주, 또 지난달의 기억을 떠올려봤지만, 모든 것이 황사철 유리창처럼 희미했다. K의 빈자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냥 정신이 혼미한 탓일까.




A그랩 택시를 불러 센탄으로 향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화려한 힐튼 호텔의 전경이 a의 가슴팍을 짓눌렀다. K와 힐튼 호텔에 들른 적이 있던가? 아니, 스위트룸에서 온종일 뒹굴었던 건 워킹스트리트 초입에 있는 아고고 바의 C다. 듣기로는 C도 며칠 전부터 사라진 모양인데, 아마 카드빚 때문일 것이다. 발렌시아가나 루이뷔통 토트백 정도는 가볍게 사 모으고, 캄보디아 카지노까지 원정도박을 떠나는 여자였으니까. A는 C의 날갯죽지에 새겨진 블랙 앤 그레이 타투를 떠올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잘 생각해보니, 그 타투는 H의 허벅지에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부지런히 주변을 살폈다. 센탄 근처에도 그놈의 흔적은 없었다. 감색 우비와 작고 깡마른 체격, 짙은 눈썹과 약간 비뚤어진 입. 라용에서 열아홉 번째 피해자를 살해할 때는 더비 슈즈를 신고 있었다지. 정황상 그놈은 남자일 확률이 훨씬 높다. 하지만 속단하기는 이르다. 그렇게 단순한 놈이었다면 잡혀도 진즉에 잡혀 현대판 굴라크로 악명 높은 어느 교도소에서 두들겨 맞고 있을 테니.


갑자기 하늘에서 비가 쏟아졌다. 남국에서 비를 맞으면 왜인지 기분이 더러워진다. 빗방울은 본래 깜짝 놀랄 정도로 차가워야 마땅한데, 지랄 맞은 남국의 빗방울은 너무나 따뜻해서 맞을수록 정신이 더욱 혼미해지기 때문이다. 욕지거리를 뱉으며 거리를 걷다 보니 벌써 싸구려 모텔 앞이다. 바지 밑단은 흠뻑 젖어있었다. A는 인상을 찌푸리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죽어버려라. 너도 죽고, 나도 죽고, 좆같은 빗방울도 다 죽어라."




A시간 감각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K의 몸뚱이가 하얗게 식은 지 세 달쯤 되던 무렵이었다. a는 아득한 정신의 끄트머리를 붙잡으며 아무 의미 없이 흘러간 시간을 생각했다.

'K가 죽은 지 1년이 지났던가, 아니다. 지난달, 경찰서에 들렀을 때 부검이 끝나고 가족들이 시체를 가지고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K의 몸뚱이가 혼의 무게만큼 가벼워진 건, 두 달 반쯤 지난 무렵부터일 것이다. 아니다. 시간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또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흐르는지 확실하지 않다. K가 정말 죽긴 죽었던가? 아주 짧은 꿈을 꾼 것이 아닌가? 잠깐, K가 나를 떠난 건 재작년이 아니었나?'

A는 인상을 한껏 찌푸리며 손목을 비비 돌렸다. 이 망할 손목은 아직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차라리 손목을 잘라버리는 게 더 났겠다는 생각에 과도를 집어 들었다가, 뭉툭한 칼날을 보고 마음을 접었다.

 

TV에서는 서른다섯 번째 피해자가 산호섬에서 발견되었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그놈은 멀쩡한 사람들을 잘만 죽이는데, A는 가느다란 자신의 손목 하나도 어쩌지 못했다. 어쩌면 그놈을 잡지 못한 것도 당연하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서, 그는 괴성을 질러댔다. 손목만큼 가느다란 A의 목소리가 복도까지 울려 퍼졌다. "왜, 왜, 왜… 씨발." 당장 채널을 돌려버리고 싶었지만, 항상 그 자리에 있던 리모컨이 보이지 않았다. TV 뒤로 손을 뻗어 버튼을 마구 눌렀다. 지난주에도, 지난달에도 잘만 넘어가던 채널이 오늘은 잘 넘어가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K의 짐이 한가득이다. A는 그녀의 흔적과 라이터 기름 한 통을 챙겨 옥상으로 올라갔다. 모두 태우고 빨리 잊는 것이 가장 덜 아픈 길일지도 모른다. 페인트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옥상에 K의 짐을 널어놓고, 기름 한 통을 모두 들이붓고, 마지막으로 성냥을 켰다. 검은색 스타킹과 경구 피임약, 그리고 듀렉스 콘돔 같은 것들이 진회색 연기를 내뿜으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그 연기가 끈적한 공기와 섞이는 일은 없었다. 매캐한 연기는 멀리, 더 멀리 날아갈 뿐이었고,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자취를 감추지 않았다. A는 그녀의 속옷 한 장 정도는 남겨둘 걸 그랬나, 후회하며 고개를 저었다.




잊었나 싶다가도 불현듯 떠오르는 사소한 기억이 있다. A에게 부모님이란 딱 그 정도의 기억이었다. A가 다섯 살 때 그를 버리고 도망간, 이십 년이 지나 불쑥 나타나 돈 몇 푼을 구걸하던, 할머니가 죽은 날 병원에 찾아와 보험은 얼마나 들어놓았냐고 묻던…, 검은색 기억으로만 가득찬 그의 부모를 그로서는 자주 떠올릴 이유도, 또 그럴 시간도 없었다.


손목을 부여잡고 병원으로 향하던 어느 아침이었다. 뜨거운 햇살 속에서 택시를 기다리던 중에, A는 문뜩 15년 전 죽은 아버지를 떠올렸다. 하루의 반 이상을 취한 채로 있었다지. 그가 죽던 순간은 얼룩진 세상이 비로소 아름다워지는 변곡점에 놓인 순간이었을 것이다. A는 떠올려서는 안 될 기억을 떠올린 양 바닥에 가래침을 뱉어냈다. 끈적한 점액질이 달라붙은 무가지에는 서른일곱 번째 피해자의 사진이 실려있었다.


병원 근처에 다다랐을 때, 또 한 번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A는 두리번거리며 가방에 넣어둔 우산을 꺼냈다. 이리저리 만지작대다가 우산을 펼치려고 하는데, 무슨 일인지 우산이 제대로 펼쳐지지 않았다. A의 속도 보다도 몇 배나 더 빠르게 흐르는 세상은 간단한 우산마저도 복잡하게 만들어버렸다. A는 두어 번 우산을 뒤적거리다, 그냥 풀숲으로 던져버렸다. 미지근한 빗방울 몇 개가 그의 입안으로 튀어 들어갔다. 왜인지 끈적하고 매스꺼운 빗방울에 K의 연기가 섞여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A는 흠뻑 젖은 몸을 이끌고 곧장 정형외과 병동으로 향했다. 의사가 오늘도 성의 없는 진단을 내린다면 병원 옥상에서 떨어져 버릴 심산으로. 어질한 시선을 간신히 부여잡으며 진료실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조금씩 희미해지더니 털썩.




멀끔한 의사가 그의 옆에 서서 뭐라 이야기를 시작했다. 디하이드레이션, 아이브이, 하스피틀라이즈드…. 화들짝 놀라 손을 만져보니 정맥주사 바늘이 느껴졌다. 의사는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 건강상태도 불안정해 보이고, 정신적으로도 많이 불안해 보이니 종합검진을 받아보라고 하는 것 같았다. 평소라면 들은 체도 하지 않았겠지만, 그때는 손목이 쥐 죽은 듯 고요했다. 한 번쯤 검사를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특별히 할 일도 없었고, 요즘 속도 자주 불편하고, 무엇보다 손목이 아프지 않으니까.


A는 간호사를 따라 회색 병동을 가로질렀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문진표에 대충 체크를 하고, 조영제를 몸뚱이에 쑤셔 넣고, 키와 체중을 쟀다. 깜빡거리는 녹색 화면에는 159, 47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키는 그대로인데 몸무게가 3kg이나 줄었다. 요즘 들어 자주 굶은 탓이다. 다른 검사들도 별 문제 없이 진행됐다. 머리가 욱신거리는 주기가 조금씩 짧아졌지만, 그래도 참을만했다.


다음 날 아침, A는 가슴팍에 '우돔폰'이라는 이름이 적힌 간호사를 따라 어느 진료실로 들어갔다. 우돔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아, 태국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의 이름이 우돔폰 어쩌고가 아니었나. 요즘은 이상하게 오래전 들었던 이름만 생생하게 기억난다. 비교적 생생한 K의 이름도, C의 이름도 무수히 많은 오랜 이름 속에 묻혀 그렇게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진료실에 들어가 작은 스툴에 앉았는데, 또 눈앞이 흐려지면서 정신이 몽롱했다. 의사가 두리번거리며 말을 이어갔지만, 대부분이 A의 귀까지 닿지 못했다. 그저 몇 가지 단어만 아른한 여운을 남길 뿐이었다. 'serious, alcohol abuse, dementia praecox…' 정말이지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숨을 크게 들이쉬는데, K의 연기가 코끝을 스치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털썩.




얼마간 시간이 흘렀다. A가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은 뜨거운 시멘트 바닥 위에서였다. 어떻게 이곳까지 오게 됐는지, 그리고 지금 여기서 뭘 하는 건지는 기억할 수 없었다. 다만 주위에 펼쳐진 풍경은 왜인지 낯이 익었다. A는 손톱으로 바닥을 긁으며 생각했다.

'도대체 저 인간들은 왜 한데 모여 시시덕거리고 있는 거지,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 K를 죽인 범인은 잡혔을까,

아니, 어차피 나랑은 상관도 없는 일이었어,

뒷주머니에 꽂아둔 담배는 또 누가 가지고 간 거야.'


A의 손목이 다시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A는 손목으로 바닥을 연신 내리치며 소리쳤다.

"부서져라, 완전히 부서져라. 다 죽어버려라, 손목도 죽고, 나도 죽고, 망할 그놈도 죽어버려라."


그때 검은 옷을 입은 누군가가 호루라기를 불며 A를 향해 달려왔다. 그들의 철제 삼단봉은 쉴 새 없이 A를 내리쳤다. A는 매질이 향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손목을 들이밀었다. 하지만 아무리 애써도 손목은 잘려나가지 않았다. A와 교도관을 둘러싼 죄수들은 환호했다. 미지근한 열대몬순의 빗방울이 양철 지붕에 부딪쳐 '후드득후드득' 소리를 내었다. 그렇게 굴라크에서의 또 다른 하루도 끝이 났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